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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잔인성 재확인시킨 디지털 성범죄, 대처엔 지체 없어야
건대신문사 | 승인 2020.03.31 22:32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성착취 영상물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건인 이른바 n번방 사건이 사회에 던져주는 충격이 크다. 주범은 미성년자 수십 명을 협박해 성착취 영상물을 찍게 하고 유포까지 한 뒤 억대의 범죄수익을 챙기다가 구속됐다. 여성 단체들에 따르면 성착취물 공유방 60여개에 이르고 참가자들이 26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존의 불법 음란물 사건과 달리 이 사건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것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범행, 광범위한 참가자, 암호화폐 등으로 오가는 거액의 범죄수익 등이 요인일 것이다. 신원추적이 어려운 모바일 메신저 환경에서 범죄의 생태계를 갖추고 상상을 뛰어넘는 잔인함을 지닌 디지털 성범죄가 횡행한다는 점이 경각심을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우선 이런 생태계가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건, 정보기술의 고도화와 그 보급이다. 그러나 본질은 그런 기술로 익명의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행동은 보이기 때문에 행위자가 스스로를 절제하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견제할 수 있다. 그 가시성이 사라지면 부정의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익명성이 보장되는 디지털 공간은 윤리의식의 '마비'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범죄를 부추기고 심지어 '과시'하는 곳으로 변질한다. 디지털 범죄 공간에 익명으로 참가한 이들은 바깥세상에서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되더라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텔레그램 대화방 '박사방'을 운영한 주범 조주빈이 3년간 각종 봉사활동을 한 사실, 범죄를 신고해 경찰로부터 감사장과 신고 보상금 등을 받았던 사실 등을 떠올리면 익명성이 어떻게 사람을 변질시키는지를 단적으로 깨닫게 한다. 익명의 공간이 범죄의 온상이 된다면 언제든 실명의 공간, 가시적 공간으로 바뀔 수 있으며 엄벌이 뒤따른다는 경각심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디지털 기술이 낳은 사회의 변화를 제도가 뒤따르지 못하는 지체 현상을 확인시켜줬다. 언론에는 n번방 사건의 주범이나 핵심 공범들을 처벌할 수는 있지만, 현행법 구조상 단순 참가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지적이 종종 소개됐다.

 

 이 사건에서 거론되는 이른바 '관전자'들은 영상물을 우연히 접한 사람들로 보기 어렵다.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진입해 회원 자격을 유지하고, 돈을 내는 구조다. 사실상 성착취물 제작과 유포라는 잔혹한 범죄의 생태계가 조성되는 데에는 관전자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n번방 사건처럼 익명의 공범자들이 다수인 디지털 성범죄에 대처하려면 처벌 규정을 세분화하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입법이나 양형 규정이 허술해 엄벌하기 어렵다는 현직 법관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최근 내부망에 올린 글에서 "n번방 사건과 같은 유형의 범죄는 다른 디지털 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보수적으로 법을 해석하는 판사들마저도 디지털 성범죄를 다스리는 현행법이나 양형 규정이 미흡하다고 말하는 상황을 정치권과 사법행정 당국은 주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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