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문학과 학술답사를 따라서

정확히 4월 28일 이른 9시 34분 100여명의 학생들을 태운 두 대의 버스는 청담대교를 지나갔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은 잔인하게 내뿜는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가장 바쁘고 정신없다는 월요일에 시작된 여행은 휴일이나 주말에 떠나는 여행과는 사뭇 다른 해방감과 쾌감을 선사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 이후 영화제는 두 번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제는 영어영문학과(이하 영문과) 학부생 80여명과 대학원생 12명 그리고 6명의 교수님이 동행했다. 교수님들의 제안으로 전주로 일반 MT가 아닌 첫 번째 학술답사를 떠나게 된 영문과 학생들은 전주로 가는 내내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 마냥 들떠있었다.

“우선 영문학은 영화를 문학으로서 바라보는 학문이기 때문에 그동안 배운 영화비평에 관해서도 공부할 수 있어 좋은 기회”라는 천민지(02)양의 말처럼 ‘영문학과 영화’ 사이의 기묘한 조화를 오늘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들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 수학여행 가는 초등학교 버스들이 몰리면서 차가 꽤 막혔다. 단국대학병원이 보이는 걸 보니 천안쯤 왔나보다. 차안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굼지럭대는 버스가 슬슬 짜증났다. 하지만 오랜만에 봄 햇살을 받고 있는 촉촉히 젖은 논과 밭 그리고 여름의 풍성함을 예감케 하는 연한 초록빛 나무의 야외풍경을 보니 선뜻 용서가 되었다. 고속도로가 뻥 뚫리고 버스가 달렸다. “천안고속도로 원할”, 고속도로 안내판에 뜬 글자가 우리들의 마음까지 뻥 뚫어 놓는다. 우리 마음은 차보다도 먼저 벌써 전주에 도착했다.

늦은 1시 32분 목적지에 도착. 잠시도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예정된 출발이 코리안 타임의 습관에 맞게 1시간이나 늦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나 빠듯하다. 호텔에 마련된 그 유명한 전주비빔밥을 10분만에 정신없이 비벼 먹고 후딱 전북대문화관으로 달려갔다.

‘미지의 구름’. 과연 영화를 보고 난 학생들의 얼굴엔 미지의 구름이 한가득 덮여 있다. 옆 상영관에서 ‘보리울의 여름’ 무대 인사를 온 영화배우 차인표와 신애를 포기하고 그 대신 본 영화는 평소에 접하기 힘든 디지털영화인데 공포심을 유발하는 음악과 영상이 괴기스러울 뿐이었다. 84분간의 어두침침한 영화 관람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다시 환한 봄낮이다. 분명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전북대문화관 주위는 한산했다. 단지 국제영화제 간판과 학생들이 꾸미는 거리예술만이 축제임을 알게 해주었을 따름.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영화도 즐길 수 있어서 좋아요. 이번 기회에 전주 문화행사가 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자원봉사자와의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대학교 안에서 이런 큰 행사를 열 수 있고,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며 즐긴다는 점에서 열흘간이지만 문화를 밤낮으로 숨쉬고 느낄 수 있는 전북대 학생이 부러웠다. 어찌하였건 우리는 다시 급하게 차에 올랐다.

영화의 거리로 나왔다. 고사동 영화의 거리는, 손맛으로 알려진 전주인 만큼 전통을 내세우는 식당과 유흥가 그리고 옷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선 좁은 골목 뒷편에, 조금은 한산하게 자리잡고 있다. 두 번째 영화는 일본 영화 ‘카쿠토’와 프랑스 영화 ‘존재의 가벼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보았다. 각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감흥은 제각기 달랐지만 줄지어 숙소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2편의 영화관람에 대한 충만감과 본능적 허기로 똑같이 바쁘게 움직였다.

늦은 9시. 조별 영화비평 세미나와 단합대회가 시작되었다. 여학생이 많은 학과인지라 오밀조밀하고 단란한 분위기가 다른 학과들과 확실히 차별되었다. 10개의 조가 오늘 보았던 영화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영화비평을 듣고 있으니 난해하기만 했던 영화들이 새롭게 이해되었다. 비교적 전통적이고 학구적인 분야인 영문학도 사람과 사상에 관한 관심과 호기심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인간이 만든 가장 사회적인 예술인 영화에 대한 그들의 비평은 아마추어답지 않게 날카롭고 개성적이었다.

세미나를 마친 뒤 바로 단합대회.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레크레이션 그리고 교수님들의 피아노 연주와 노래가 어우러진 고상한 문예공연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이어 폭발적 반응의 미스 영문 대회까지. 교수님과 학생이 하나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긴장되면서도 즐거운 시간이 밤새 계속되었다.

다음날 아침. 한 발 늦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밤새 기울인 술잔으로 머리 속은 텅 비어있고, 공기 속에 파고든 축축한 습기는 우산 없는 상황만큼이나 짜증나게 했다. 마지막 일정은 멋의 고장 전주 풍남동·교동 한옥마을로 갔다. 고풍스런 기와집들이 정겹게 지붕을 맞대고 있는 단아한 마을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깔끔하게 인도에 깔린 화강암석이 풍기는 전통의 향기는 비에 젖어 운치를 더했다.

공예관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던 수강생의 “비오는 날 처마 밑을 보세요”라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 단아한 한옥 담너머로 고개를 내민 연초록빛 새순과 화사한 봄꽃이 더없이 멋스러운 4월의 전주. 한국의 전통미…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다시 서울로. 비는 더욱 더 세차게 내렸다. 1박 2일의 빡빡하고 낯선 경험을 이젠 추억으로 남겨두고 차에 올랐다. “이런 답사가 처음인데 교수님들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학생들 모두 ‘영화제’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왔다가 영화를 새롭게 즐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이 영화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필름 매니아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김상현 학생대표는 말했다. 정말 그랬다. 다시 일상 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는 어제의 관객이 아닌 오늘의 특별한 영화인들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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