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지 시사부장

세상을 보면 둘로 나뉘어 참 많이 싸우곤 한다. 한국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는 진보와 보수의 싸움, 여성과 남성의 싸움. 누군가에겐 이념 싸움이고, 누군가에겐 이익 싸움이다.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싸움 구경이 너무 힘들었다. 부부싸움에 끼어 엄마와 아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아이처럼 마치 나도 한쪽 편에 서서 강하게 싸워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괜히 싸우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 “왜?”라고 시비를 걸어보고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반대할 이유를 찾기도 했다. 막 스무 살이 됐던 작년엔 확실한 주관이 있는 주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세상 시끄럽게 다양한 사건이 터져 나올 때마다 본인의 주관에 따라 당당하게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 자신이 작아졌다.

이렇게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때 해답을 찾은 건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였다. 이 책의 작가인 문유석 판사는 “어차피 정답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고 기술한다. 이제껏 수없이 많은 재판에서 죄를 단죄하는 재판관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나를 적잖게 놀라게 했다. 판사가 ‘법’이라는 사회적 테두리 안에서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나쁜 악역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가슴 절절한 사연을 들으면 ‘나쁜 악역’이 정답이라고 쉽게 단정짓기 어렵지 않은가. 작가는 정답을 찾기 위해 어느 한쪽에 서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단순한 방관이 아니다. 주관 없이 줏대 없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 역시 아니다. 대신 ‘아~그럴 수도 있겠구나’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내 생각을 지키며 상대방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가 아닌 ‘나도, 너도 옳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세상은 너무나 다양하고 나는 그 다양한 사람 중 하나일 뿐, 옳다 그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어느 쪽 편에 서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실재하는 수많은 싸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끄러운 싸움에 임할 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건 어떨까.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는 세상으로부터 전면적인 인정, 사랑, 존경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는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p.19

나 역시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는 레고 조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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