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은(문과대·미컴20)

당신에게 묻고 싶다. 지금 인생의 어디쯤 서있는가.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 달려왔는가.

 

우리는 성장한다. 키도 커지고 몸무게도 늘지만, 그뿐만 아니라 내면도 단단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속에는 기쁜 일, 슬픈 일, 그저 그런 일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있다. 요새 MBTI가 유행인데 그 중, 이성적이냐(T) 감성적이냐(F)를 가르는 것은 감정의 선후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안에 감정을 가둬두고 통제하는 반면 감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본인이 이끌려간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통제하는데 벅차하고 종종 휩쓸려 무너질 때도 있다. 그럼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할까? 혼자서 벽을 잡고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나를 일으켜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후자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지는 말자. 그도 그의 사정이 있을 테니.

 

필자의 은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다. ‘이해할 수 없으면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을 당시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말이 성립되려면 ‘핑계’라는 단어가 사라져야 되지 않겠는가. 약간의 억울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필자 또한 짙은 상처가 남아있고 흉이 져 인생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정은 개인의 흠을 합리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이 납득되기 시작하면서 그저 평범했던 윤리 선생님은 필자의 은사님이 되었다.

 

커갈수록 우리는 서서히 깨닫는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는 것.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거위는 수면 밖의 우아함을 위해 물속에서 엄청난 발버둥을 친다고 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모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각자 꿈꾸는 이상을 향해, 전진을 방해하는 징크스와 트라우마를 외면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트라우마는 참 나쁜 아이다. 진정 사랑하면 놓아주는 법도 알아야 하는데, 트라우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트라우마는 해결이 아니라 극복한다고 표현한다. 즉,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필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 의문점이 든다. 트라우마가 생긴 시발점은 나의 잘못일까?

 

하지만 극복의 주체가 나여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모두 개인의 영역에서 이런 무책임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크든 작든 본인이 제일 불쌍한 법이다. 하지만 신께서 누가 제일 불쌍한지 절대적으로 순위를 매겨주실 순 없다. 당장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본인 중에서 누가 더 힘들고 행복하고를 따지는 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저 사람은 그렇구나. ‘아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시각을 가져줬으면 한다. 필자도 당신을 그렇게 바라볼 테니 당신도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봐주기를 희망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 덜 억울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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