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은 대학부 기자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결했다. 1953년에 제정돼, 66년 동안 이어져 온 낙태에 대한 여성 처벌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10월 7일, 정부가 밝힌 입법 예고는 많은 여성 단체 및 인권 협회에서 기대한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와 거리가 멀었다. 정부가 발표한 법안에 따르면 기존의 ‘낙태죄’에 ‘허용조건’을 추가했을 뿐, 여전히 낙태를 선택한 여성과 시술 의료진에 대한 처벌 자체는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에 낙태죄의 존폐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정부 발표 다음 날인 8일에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 행동’이라는 이름의 기자회견이 있었으며 지난 11월 9일엔 전국 20여 곳 대학의 페미니즘 동아리가 모인 연합체가 성명서를 제출했다. 한편, 같은 날 한국교회총연합의 ‘낙태죄 개정안 반대 시위’가 있기도 했다.

이러한 ‘낙태죄’를 두고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다. 헌재의 판결도 이 중 무엇이 ‘우선’인가를 기조로 진행돼왔으며 여러 논의에서 주 안건으로 다뤄지는 것 또한 해당 사안이다. 그러나 본인은 낙태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저울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낙태는 모체와 태아의 미래를 염두하고 고려하는 문제이며 나아가 ‘삶’ 자체를 다루는 선택이다. 이를 ‘임부’와 ‘아이’의 문제로만 상정하고 이분하는 것은 결국 남성과 국가의 책임 회피 아래 아이의 양육이 여성에게만 배당되는 것이다. 더불어 여성의 임신을 사회 차원의 물질적 가치로 환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인식에서부터 낙태는 ‘죄’가 된다. 여성의 재생산 권리가 범죄화되며 여성은 죄의식의 굴레에 갇힐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낙태 정당성(강간, 가난의 고통)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임으로써 대상화되고 만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자기 삶의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선 타인에게 인정받아야만 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아티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바바라 크루커’는 이러한 낙태죄 문제에 대해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목소리는 담론의 장에서 배제된 채 종교계와 정치, 국력의 문제로 여성의 몸이 환원됨을 지적한 것이다. 지난한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가부장제의 부성 계승을 위해 견고해진 여성의 재생산 역할에 대한 억압은 현대사회의 ‘도그마’로 작동하며 여성을 속박하고 여성의 삶을 ‘죄’로 얽매고 있다. 2020년, 66년이 흘러 많은 여성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우리 사회는 더욱 저열한 방식으로 공동체의 절반을 몰아내고 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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