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의 세월이 흐르긴 했어도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 문학의 쾌거다. 맨부커상은 노벨문학상,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에 해당한다. 한강의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라는 단어에 걸맞게 어느 날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다. 물론 영혜 역시 어떤 꿈을 꾸기 전까지는 일반인의 섭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고기를 먹거나 즐겨 고기로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도살장과 같은 곳에서 온몸과 얼굴이 피 칠로 범벅이 된 꿈을 꾸게 된 이후로 그녀는 단호하게 고기 섭생을 끊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고기들을 내다 버리게 된다.

 

아마도 영혜는 도살장과 같은 곳에서 천장에 빼곡하게 매달려 있는 시뻘건 고기 숲을 헤쳐나가던 꿈을 통해 세상의 온천지가 살육의 현장임을 절감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아홉 살 때 자기를 문 개를 오토바이에 묶고 동네를 몇 바퀴나 끌고 달리던 아버지를 응원하면서 혀를 빼물고 지쳐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개를 가학적으로 괘씸해하던 자기를 어느 날 갑자기 소름끼치게 바라보게 되면서부터다. 말하자면 영혜는 자기 역시 그런 가학적 살육의 섭생 문화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수혜자였다는 사실로부터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 같다. 문제는 영혜가 이런 가학적 문화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게 되었을 뿐 타자에 대해서는 결코 강요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의 주변 인물들, 특히 월남전에서 ‘역전의 용사’였던 아버지는 이러한 영혜의 행위가 주류 사회의 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로 강제로 그녀의 입에 고기를 ‘집어넣는’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아버지가 월남에서 베트콩 몇 명을 죽였던 무용담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들이 그것을 감탄하면서 우러러볼 때 폭력과 살해의 문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이 세상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폭력에 영혜는 자해의 방식으로 맞서게 되고 마침내 한 가족의 평온함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도대체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름의 ‘주류 사회 문화’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자연스러움이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이탈자들을 이다지도 무지막지하게 이단시하고 폭력적으로 제압하게 되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 ‘약간의 이탈자’들은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게 된 사람들로 나타나는데 이 육식/채식의 관계를 정상성/비정상성, 혹은 강자 지향성/약자 지향성 등의 구분으로 바꿀 수 있다면 ‘육식’이라는 단어에 ‘부자, 남자, 비장애인, 명문대 졸업생, 한국 국적 소유자, 피부색이 검지 않은 자’ 등등을, ‘채식’이라는 단어에 ‘여성, 장애인, 지방대 졸업생, 탈북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 노인, (동남아) 이주노동자’ 등등을 대입시켜도 무방하다. 이렇게 본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채식’과 ‘육식’이라는 언어적 대립을 통해 한국사회의 오랜 폭력적 중심문화를 해체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세계적 상을 받았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작품을 통해 한국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모색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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