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들으러, 친구를 만나러, 바삐 바삐 걷는 동안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나무라면, 그저 소나무·은행나무·대나무… 더 이상 딱히 떠올리지 못하는 우리. 우리나라에 단 한 그루 있는 나무의 곁을 지나면서도 우리는 그 나무에 눈길조차 주지 못한다.

“이건 층층나무.” 농대를 나오면서, 김교수는 한 그루 한 그루 일일이 손으로 집어주며 나무를 소개한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한해를 주기로 한꺼번에 가지를 쳐요. 그래서 나무 기둥에서 몇 번 가지들이 뻗어 나왔는가를 보면 그 나이를 알 수 있는데, 이 나무는 그 층이 뚜렷해요.”

누가 층층나무 아니랄까봐, 같은 해 뻗어 나온 가지들의 곁가지도 그 층을 넘어서서 뻗질 않는다. 게다가 그 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들은 꼭, 코팅한 잎사귀처럼 쫙 펼쳐 진 채 누워있어서 잎들도 그 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볕을 놓칠세라 기를 쓰는 게지. 청포도 알맹이처럼 투명한 연두색 잎의 선이 참으로 말끔하고 귀엽다.

■ 비밀 화원 몰래 들어가 볼까?

김교수가 농대 ‘비밀화원’에 기자를 초대한다. 건대병원 뒤쪽에 있는 비밀화원은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지만, 학생들에게 우리대학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비밀화원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들어가자마자 소개해 주는 것이, 흙호두 나무. 사범대 뒤쪽에서 자주 보이는 커다란 다람쥐 같이 생긴 동물, 청솔모가 매우 좋아하는 열매가 열린단다.

“청솔모에겐 참 맛있는 열매”라고. 아래 소복이 쌓인 나뭇잎들 사이에서 김교수가 찾아준 흙호두는 우리가 먹는 호두의 절반정도 크기였다. 검정색의 축소형 호두. 청솔모는 “이것을 따서 두손으로 잡고 이빨로 갉아먹는다”고 한다. “특히 열매를 많이 딴 날은 그것을 땅 속에 묻어둔다”고.

“그런데 열매를 묻어둔 곳을 기억하지 못해 결국은 그 씨앗이 자라 흙호두나무로 자라기도 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라고. 비밀화원에서 나와 도서관 앞 소나무 앞에 섰다. 이름은 미인송. 농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미인송은 “백두산에서 그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흔히들 소나무의 휘어진 모습을 보고 감탄 하지만, 진정한 소나무의 매력은 언제나 푸르고 곧은 신념과 위엄이다.

 그에 걸맞는 미인송. 기둥이나, 가지나, 어느 곳 하나 휘어짐이 없다. 망설임도 없다. 그저 꼿꼿하게 거침없이 하늘을 향하는 기둥과 솔잎. 북이나 남이나, 우리 한반도의 근본이 바로 이런 ‘곧음’이 아닐까. 화려한 흐트러짐 없이 그저 묵묵하고 힘찬 기개를 떠올려 본다. “이게 바로 ‘히말라야시다’예요.” 김교수가 “우리학교 밖에 없다”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좋은 품종”이라 몇 번이나 강조하던 그 나무, 히말라야시다. 알고보니, 학내에 가장 많이 심어진 나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있다.

하루에 한번 이상은 꼭 이 길을 지나가는데…도서관 들어가는 길목과 일감호 주변이 모두 히말라야시다다. 하늘을 찌를 듯 가지가 뾰족하게 하늘로 치솟고, 잎들은 다들 축축 늘어져 꼭 걸레를 걸어놓은 것 같다. 그 걸려있는 잎들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비가 오면 그 빗물을 모두 꽉 움켜쥘 것 같은 잎들. 가지에 걸린 푸른 걸레들이 바람을 만나 무더기로 춤을 추면 나무 전체가 어떤 음악을 만들어낼 것처럼 공기의 움직임을 즐긴다.

■ 온통 초록빛 일감호 뒷동산으로

정문에서 학관 쪽으로 가다보면 언제나 보이는 일감호 뒷동산. 봄이면 연두색, 노란색, 분홍색 등 화려하게 채색돼 일감호의 멋에 크게 기여하는 일감호 뒷동산으로 향한다.

상허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 길쭉한 하트 모양의 잎이 달린 ‘피나무’가 서있다. 잎이 얇아서 하트의 윗부분이 뒤로 말렸다. 5시쯤이 되어 해가 조금 내려앉자 워낙에 얇은 잎이 그 빛을 받아 더욱 투명하다. 어린 바람이 살짝 건드려도 어떤 고민 없이, 어떤 묵직함 없이 그저 바람이 부는대로 몸을 맡기는 가벼움.

■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대학 나무들

좀더 들어가니 기숙사 가는 산책로에 다다른다. 오늘도 역시나 아주머니들이 나무에 기대어 삼림욕을 하고 있다. “저 모습이 얼마나 좋아요∼” 김교수는 우리대학이 교내 삼림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우리대학의 삼림이 정말 좋아요.

우리나라 전체에도 없는 나무들도 많고. 이런 나무나 풀들을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생태교육의 현장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렇게 사람들이 삼림욕을 해도 좋고.” 이렇게 학교교정을 거닐며 김교수로부터 수많은 나무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희귀한 나무들을 그대로 둔다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김교수는 “우리대학은 광진구 생태의 축으로 너무나 중요하다”고 한다. “광진구의 하늘에서 보면 알 수 있어요.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 어린이대공원, 우리학교, 뚝섬까지가 하나의 녹지 축이죠. 그런데 능동로 때문에 이 축이 끊겼어요. 그나마 끊어진 생명의 축을 바람과 새가 연결시켜주고 있죠. 우리에겐 이 축을 잘 보존할 의무가 있어요.” 우리대학이 그토록 중요한 삼림축의 한 부분이었다니, 너무나 놀라웠다. 그저 일감호로 대표되는 넓은 부지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태계의 중심에 있는 곳이었다니.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주변의 녹색들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온다. 왜 안보였을까. 이렇게 많은 녹색 생명들이. 봄이면 항상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벚꽃 때문이었다. 주변 나무들의 원기를 빨아들여 그 아름다움을 유지한다는 벚꽃나무. 그 잔인한 화려함을 보며 무궁화가 어찌나 누추하게 여겨지던지.

그런데, 그런 벚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바로 내 앞에 있는 나무란다. 귀룽나무. 이 큰 나무가 조금만 지나면 하얀색 꽃으로 가득해 진다고 한다. “흰 꽃이 기가 막히다”는 김교수의 말 속에서 그 멋들어짐의 깊이를 짐작해 본다.

■ 한걸음 한걸음 이과대 오솔길

벌써 이과대 뒤쪽으로 왔다. 앞에 돌로 만들어진 오솔길이 나있다.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 요정들이 사는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처럼 꽃들의 수다가 가득한 신비스러운 길. 이과대 뒤쪽을 휘 돌아 감싸는 아름다운 공간. 눈앞에 펼쳐지는 화려한 꽃들과 너무나 새로운 모양의 나무들.

학교에 숨겨진 유적을 발견한 것처럼 놀랍고 기쁘다. 참으로, 오랜만에 즐겁다. 건대부고 학생들이 막 학교가 끝났는지 갑자기 물밀 듯 몰려온다. 교복을 입을 그들의 웃음소리 사이를 지나 새천년관 앞의 자작나무에 다다랐다. “숲속의 여왕이라 불리는 나무예요.” 김교수가 다시금 말을 열었다.

하얀 기둥의 나무. 여인의 속살이라고 하던가. 이 나무의 하얀 껍질을 벗겨내 편지를 쓰기도 한다고. 부드런 나무껍질에 사랑의 글을 쓰는 설렘은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만약 언젠가 여기가 벗겨지면 제가 가져간 거예요∼”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래도 칼을 대지는 못하겠다. 이 곱고 여린 기둥에 어떻게 칼을 대고 흉터를 남길까. 하얀 나뭇잎에 글자를 넣는 즐거움과 잔인한 자작나무의 상처. 그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갈등.

■ 화사한 봄의 재잘거림 사범대 뒷길

황소상이 있는 잔디밭을 가로질러 높이 있는 사범대로 향한다. 벚꽃과 목련, 유채나무 덕에 대학원이나 사범대가 하나의 화폭에 묻힌다. 색색이 화려한 예쁜 옷을 오랜만에 꺼내 입는 설렘으로 충만한 비탈길을 올라보니 쭉 뻗은 길이 드러난다.

하얀 길에 황토 흙이 흩어져 있어 마치 엷은 햇볕이 깔려있는 듯하다. 무어라 무어라 쉬지 않고 재잘대는 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탄한 길을 걷는 마음이란 참으로 편안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갓 싹을 틔운 나무들이 내 위를 편안하게 감싸주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나무가 자두나무”란다.

여름엔 공부하다가 나와서 자두 한 알을 따먹을 수 있다. 가을이면 친구들과 나와 그 옆에 있는 호두나무에서 호두를 따, 깨먹으면? 너무나 원했던 바람. 대학이라면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했던 그런 사소한 즐거움의 생활이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지난해. 그리고 사실은 그 사소함이 바로 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참으로, 참으로 기쁘다. 봄의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사범대 주변을 지나 외국어교육원 뒷길을 걷는다.

봄의 화려함에 들뜬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돌길이 이곳에 있다. 오직 푸르름만 있는 곳. 사범대쪽이 어린 천사들의 놀이터라면, 이곳 외국어교육원 뒷길은 남신의 비밀스런 사색의 공간이다. 한여름 울창한 숲 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할까? 수양 벗나무, 귀룽나무, 층층나무 등 연두와 초록의 싱그러움만이 가득한 곳이다. 청솔모가 가끔씩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에서 김교수와의 산책을 마친다.

너무나 몰랐던 ‘나무’라는 이름의 멋진 녀석들. 그리고 이 녀석들의 한 흐름 속에 우리 대학이 놓여있다는 사실의 발견. 우리대학이 황량하던가? 크기만 하던가? 단지 호수와 오리뿐이던가? 지금 걷고 있는 주위를 둘러보자. 녀석들의 모습을 자세히, 자세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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