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을 말한다

1986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군부에 의해, 언론에 의해 탄압받은 당시 대학생들을 기리고자 본사는 10·28 그 현장과 언론보도를 정리해 담았다. 현장스케치는 건대항쟁을 사실적으로 담은 <사흘낮 사흘밤>(풀빛, 심산)과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돌베개, 박세길)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편집자 풀이-

건대항쟁(1986년 10월 28일) 1980년 광주항쟁으로 미국이 우방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고 직선제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전국의 대학생들은 ‘전국 반외세ㆍ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게 됐다. 건대항쟁은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 이른바 ‘애학투련’ 발족식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대학 민주광장에 모인 2천여 명의 대학생이 경찰의 진압에 밀려 본관, 도서관, 사회과학관 등으로 들어가 사흘밤낮을 점거, 항쟁한 사건이다.

단일사건으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1,525명 연행, 1,285명을 구속시키는 기록을 남겼으며 이듬해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촉발된 국민의 열망과 함께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6.10.28

늦은 3시. “전두환 물러가라!” 2000여 애학투련 동지들의 외마디 함성. 본관 앞 잔디밭에 모인 동지들에게 최루탄이 날아든다. 쫓긴다. 세 갈래로 나뉜다. 도서관, 본관, 사회과학관. 열심히 뛴다. 뛰지 않으면 잡힌다. 여학생이 넘어진다. 얼굴에 흐르는 피. 그녀를 구할 수 없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쫓기는 몸으로 그것은 사치일 뿐. 동지들은 그녀를 넘고 넘어 건물 안으로, 안으로 내몰린다.

늦은 7시. 예상하지 못한 농성. 가벼운 옷차림에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 첫 끼니. 컵라면 하나를 여섯 명이 나눠먹어야 한다. 하루 두 끼, 라면 한 개에 여섯 명. 최루탄을 견디다 못한 동지들이 창문을 깼다. 온기는 나가고 추위와 공포가 들어찼다. 게다가 단전과 단수까지. 건물 안은 암흑세계다.

서로의 얼굴이라도 확인하고자 남학생들의 속옷으로 횃불을 켰다. 달거리 중인 여성동지는 현수막을 찢어 소파에서 빼낸 솜과 휴지를 더해 생리대를 만들어 쓴다. 너무나 암울하다. 그러나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도 ‘반독재ㆍ반외세를 향한 열망’은 식힐 수 없다.

당시 언론보도는... 1986년 10월 28일. 당시 2천여명의 학생들이 건대에 갇혀 있었지만 언론은 10.28 건대 항쟁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 1면 머릿기사는 국회 경제 분야에 관한 대정부 질문을 다룬 “고학력 실업 대책 세워라”이고 중앙일보의 1면도 여야가 내주 중 대표 회담을 열어 개헌 특위의 정상화를 모색한다는 내용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동아일보의 6면에 박스 기획, ‘지금 대학가는…’이라는 시리즈 기사다. ‘구호가 과격해지고 있다’, ‘올 들어 좌경색채 선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기사는 10월 29일자 6면에 2번째 시리즈가, 그리고 건대 항쟁이 완전히 끝난 11월 1일에 마지막 3번째 기사가 실린다.

1986.10.29

이른 2시. 아직도 투석전 중이다. ‘전투조’와 군경 간의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밖에선 온갖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고 있다. 하필이면 지금 내리는 첫눈. 난데없이 불어 닥친 한파에 맞서 싸우며 민주화를 고민하는 동지들은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없다. 첫 눈의 낭만은 우리에게 시련이다.

이른 7시. 새로운 소식이 도착했다. 설마했다. 전두환이 농성 중인 1500명 전원을 연행하겠다고 한다. 게다가 돌멩이와 화염병이 전부인 우리에게 테러진압 특수부대를 투입하겠다니. 언론은 우리를 ‘친북 공산혁명분자’로 칭하고 있다. 우리를 뿔달린 괴물로 생각할 국민들의 시선이 두렵다. 우린 괴물이 아니다.

늦은 1시. 식량 배급 줄이 생겼다. 사회과학관 1층 매점이다. 본관 지도부가 군경 몰래 사회과학관에 다녀와 배급할 예정이다. 본관 모처에서는 지도부가 외신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한다. “…우리는 언론에 의해 조작당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언론은 이미 전두환의 수족이기에 저 외국인들은 우리의 유일한 분출구이다. 우리의 언론은 우리를 알려주지 못한다.

늦은 10시.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다. 그래도 우린 토론을 통한 교육과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이미 우릴 지탱해주는 것은 차가운 육신보단 뜨거운 믿음이다. 동지에 대한 믿음, 민주화에 대한 믿음으로 헬리콥터에서 내던지는 ‘자진해산증서’를 뿌리친다.

당시 언론보도는...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망을 안기는 1500명 연행 소식은 동아일보에서 먼저 찾을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11면에 ‘철야 900명 모두 연행키로’라는 내용을 보도하며, 사건 자체보다 검찰의 강경 대응 방침을 주로 보도했다. ‘학생대표단이 학교 측과 여섯 차례나 만나서 경찰의 철수와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보이지만 경찰 측에서는 “시위가 북괴주장에 동조하고 격렬한 파괴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들어 학생의 요구를 일축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보도가 되기는 했지만 사건의 일부분만 확대 해석해 사실을 왜곡한 경우도 있다. 서울신문은 11면에서 10.28 건대항쟁을 “대학가로 번진 국시(국가의 근본 방침) 부정”이라고 단정하며 전경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는 과격한 학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함께 실었다. 기사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남녁땅 민중이 선택한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에 깨부숴야 한다’는 내용의 벽보가 북괴의 대남모략선전을 그대로 옮긴 사례”라고 보도하며 마치 학생들이 예정된 계획에 따라 건국대 본관을 점거해 철야농성을 벌이는 것처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최동근(상경대·경제89졸) 동문의 말에 의하면 “집회를 하던 학생들은 평화롭게 해산하려 했지만 경찰들이 학교 문을 포위하고 학생들을 건물 안에 가둔 것”이 사실이었다.

1986.10.30

이른 8시. 몇몇 동지들이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환자를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들의 눈에 우리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빨갱이, 불순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인가. 우리도 사람이다. 동지들이 죽어가고 있단 말이다.

늦은 9시. 억울하다. 우린 9시 뉴스에 의해 처참히 짓밟혔다. ‘북한 공산괴뢰집단’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수공(水攻)이 우려된다며 국민들을 공포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63빌딩이 물에 잠기는 화면은 영화가 따로 없다. 겁에 질린 국민들에게 우리는 수공을 펼치려는 괴뢰집단의 수하들이다. 저 정권의 노리개들! 아아!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담는 언론은 없단 말인가!

당시 언론보도는... 이날 처음으로 10.28 건대 항쟁을 다룬 조선일보는 ‘5개 건물 점거, 적색구호 외침’이라는 표제를 뽑고 ‘농성 대표 비타협, 결사 투쟁하겠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하지만 기사를 살펴보면 학생들이 농성해제 조건으로 △농성학생들을 소속대학으로 안전하게 보내줄 것 △경찰진입 시 불상사를 방지할 것 등을 먼저 제시했으나 경찰은 “학생들의 시위가 반공을 부정하고 친공 구호를 내세우고 있어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유인물 분석 기사를 통해 ‘평화 협정, 88올림픽 공동 개최’ 등 북한과 주장이 같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동아일보는 헬기를 동원해 전단을 뿌리며 농성 중지를 종용하는 경찰 그리고 해산을 거부한 채 감기약과 음식을 줄 것을 요구하는 학생의 대치를 보도했다. 그리고 농성 유인물을 분석하는 기사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평화협정 체결, 군비축소회담, 남북한 상호불가침조약 체결, 주한미군 철수”같은 학생들의 주장이 북한의 통일노선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30일자 조선, 중앙, 동아 세 신문은 건대항쟁 기사를 당시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이돈명 인권 변호사를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구속한 사건을 보도한 기사와 같은 면에 배치한 사실이 눈에 띈다.

그리고 중앙, 동아는 1면 머릿기사에 “금강산 수전댐 건설 중지하라”는 내용으로 북한이 현재 계획 중인 금강산 발전소가 저수량을 한꺼번에 방류하면 서울을 포함해 중부지방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건물 속 학생들에게는 영화 같은 일이 신문에서는 사실적인 위협으로 보도되고 있던 것이다.

서울신문은 ‘난동의 잔해’라는 사진을 보여주며 “22개 대학 7백여명의 좌경과격 학생들에 의해 3일째 점거되어 있는 건국대 본관 건물 앞에는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이들의 시위가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입증해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986.10.31이른 3시.

밤새 이어진 선동방송. 부모님의 절규로 가득찬 그 방송을 듣고 동지들은 슬퍼한다. 녹음한 음성이지만 충분히 애련하다. 자식으로서의 죄송함과 대학생으로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의 정적이 온 건물에 가득하다.

이른 10시 저들이 불타는 바리케이트로 우리를 밀어붙여 태워버릴 기세로 진입한다. 헬리콥터의 직격탄에, 일감호 물에 탄 최루액에 우리는 붉디붉은 핏빛으로 파괴된다. 우리들의 건대항쟁은 이대로 끝나게 될 것이다. 마침내 기나긴 투쟁의 끝! 그러나 시작이다. 민주항쟁의 불길은 이제 활화산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바로 여기, 건국대학교를 시발점으로!         최준민 기자 -gyfldjaak@hotmail.com-

당시 언론보도는... 이날도 여전히 금강산 발전소에 대한 기사는 계속 강조됐다. 서울신문은 1면에서 “북괴, 휴전선 북방에 2백억톤 댐 건설”을 다루면서 “군사적 이용이 불 보듯 뻔하다”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여전히 건대에 모인 학생들이 사흘째 화염병을 쌓아 놓고 해산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보도기사와 “연 3일째 건국대를 점거, 난동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 헬기가 설득 전단을 뿌리고 있으나 옥상 위의 학생들은 계속 북괴선전 구호를 외치며 극렬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진글이 담긴 사진을 같이 배치했다.

조선일보도 1면 머릿기사가 “금강산 댐 건설 중지하라”는 내용이며 “만약 무너지면 중부, 수도권 폐허화”라는 내용으로 댐 건설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10면에서는 “건대사태로 본 최근 대학가 양상”이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일부 운동권의 과격한 학생들이 주변대학으로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연합시위’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1면에서는 “교직원 천여명과 농성 학생들의 학부모들을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학생들을 적극 설득키로 했다”는 기사를 보도하며 “오늘 중 경찰이 진입할 방침”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양윤성 기자 yoon8383@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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