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건대신문> 50년 역사를 돌아본다 - ②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온 나라에 가득했던 1980년대. 당시 <건대신문>은 시대 정세의 대변자로, 정당한 외침의 선봉에서 장한벌 여론을 선도했다. 진실을 전달하는 진보적 매체의 가뭄이 일던 시절, 대학신문은 시대의 양심적 위치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이러한 움직임은 <건대신문>의 지면에 생생히 녹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의 학원자율화 움직임, 학생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10ㆍ28 건대항쟁’, 온 민중의 민주화 열기로 충만했던 ‘87년 6월 항쟁’ 등이 그 예라 하겠다. 또한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외치는 움직임 역시 지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시대의 진보적 사상을 담고 현실 문제를 진단하는 기획들이 눈에 띄었고, 대학신문이 일궈 놓은 우리나라 매체의 혁신점인 ‘가로쓰기’도 84년에 도입됐다.

■ 학원민주화, 그 염원 쟁취를 위한 외침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난 이후, 대학가에는 학원자율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 부르는데, <건대신문>의 지면에도 봄기운이 충만했다. 604호(1980. 2. 27)와 605호(1980. 3. 5)에 학원자율화의 방법에 대한 기고 글을 배치하기도 했다. 그 이후 84년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가 발족, 이후의 움직임을 지면에 담아내기도 했다.

■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

당시 <건대신문>은 반독재, 민주화의 기치를 4ㆍ19 혁명정신의 계승에서 찾았다. 743호(1985. 4. 15)에서는 4면 분량의 4ㆍ19에 관련된 기획 및 기고를 생산해내기도 했다. 또한 학생운동의 한 획을 그은 ‘10ㆍ28 건대항쟁’이 일어난 후, <건대신문>은 10ㆍ28의 진상을 알리는 기획 ‘애국시민 여러분!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친공 논리에 분노한다’ 등(이상 779호 - 1986. 11. 6)을 생산했다. ‘10ㆍ28’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한국사회는 1987년 6월을 맞게 된다.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대표되는 ‘87년 6월 항쟁’은 한국사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건대신문> 역시 ‘6월 항쟁’ 이후 1990년도 초까지 자주ㆍ민주ㆍ통일, 민족해방, 계급해방 등의 기치로 사회의 민주화, 진보의 발걸음을 걸어왔다.

■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위하여

사회 각계 각층들의 운동성이 담보되고, 학생운동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며 전진할 즈음, <건대신문>은 사립대학의 공공성에도 눈을 돌렸다. 80년도 우리대학의 불법 토지매매 사건이 밝혀지자 ‘학교토지 매매사건 엄청난 보도에 충격(611호 - 1980. 4. 23)’, ‘재단문제 진정한 해결방안은?(612호 - 1980. 4. 30)’ 등의 기사를 다룸으로써 학우들에게 알 권리를 제공했다. 또한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됐던 1987년에는 ‘사학은 주식회사인가(798호 - 87. 9. 7)’, ‘사학이 사설왕국은 아니다 - 족벌사학재단의 실태(799호 - 87. 9. 14)’ 등을 보도함으로써 사학의 공공성 확보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 기획광고로 진실을 알렸던 <건대신문>과 가로쓰기 편집

80년대 <건대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두 가지, 기획광고 도입과 가로쓰기 편집 시행이다. 기획광고는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광고이며, 내용으로는 ‘노태우 아저씨가 암만 “믿어주세요” 해도 믿지 않겠다’(846호 - 1989. 9. 4),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부터 쫓아내기 위하여’(861호 - 1990. 4. 2) 등이 있다. 한편, 가로쓰기 편집이 대학신문을 필두로 시행됐다. <건대신문>은 1984년 지령 711호를 기점으로 가로쓰기 편집을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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