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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 허리펴는 그날까지2003년 3·8 세계여성의 날 95주년 기념 여성 노동자 걷기대회의 현장 보고
홍미진 기자 | 승인 2003.03.17 00:00

“뭘 싸게 파나?” 9일 늦은 1시. 관악산 매표소 앞에 왠 아주머니들이 우르르 모여있다. 뽀글머리에 두꺼운 점퍼를 입은 아주머니들의 얼굴에서 콩나물 100원이라도 더 깎으려는 듯한 알뜰한 느낌이 배어난다.

가까이 가보니 이들의 가슴과 등에 ‘비정규직 차별 철폐’, ‘특수고용노동자 노동 3권 보장’이라 쓰인 연두색 천이 걸쳐져 있다. 이들은 ‘3·8 여성의 날’을 기념해 ‘여성노동자 전국 걷기 대회’를 개최, 8일과 9일 이틀동안 전국 7개의 도시에서 걷기대회를 열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한다. 박남희(전국여성노동조합서울장)씨와 윤혜정(서울 여성노동자회장)씨가 개회식의 사회자. 이들은 “여성노동자의 73%인 비정규직노동자가 결혼이나 임신 때문에 해고의 위험을 느껴야하는 현실”과 “대부분이 여성인 특수고용노동자가 노동 3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이들은 “그러한 현실을 해결할 법안 개정이 필요하며 그 법안이 실제 노동현장에서 지켜지도록 행정지도를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걷기운동에 참가한 네식구 걷기대회

시작을 여는 하늘은 맑고 푸르다. 간간히 참가자들을 감싸주는 옅은 햇볕. 그리고 상쾌한 습기로 짙어진 관악산의 풀·나무 냄새가 더욱 기분좋게 한다. 저기, 네식구가 걷기대회에 함께 참여해 나란히 걷고 있다.

엄마의 허리에도 닫지 않는 키의 다원이, 대원이가 엄마 이영란(34)씨와 아빠 허창환(40)씨 사이에서 예쁜 장난을 한다. 이들 부부는 무엇보다도 “육·탁아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허창환씨는 “산전·후 휴가 월급이 30만원인데,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산전·후 휴가보다는 일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고, 엄마와 아빠가 모두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육아문제나 탁아문제가 현실적으로 가장 와 닿는다”는 것이다.

이에 이영란씨는 “때문에 이런 맞벌이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육·탁아 문제를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엄마, 아빠, 딸, 아들, 누구 한 명 뒤처지지 않고 누구 한 명 차별 없이 나란히 걷는 이 가족의 뒷 모습에서 진정한 평등의 세계를 여는 시작을 본다.

■비정규직 체험하기

조금 더 가니 ‘현실구간’이 열린다. 남성과 여성이 각자 통과해야 하는 문이 다른데, 여성의 문은 매우 낮아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 그 문에는 ‘여자 직원? 미혼, 미모 따져야지!’, ‘여직원이 승진은 무슨 승진이야’라는 직장내의 편견들이 가득 적혀있다.

이런 편견 앞에 여성들은 몸을 굽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조금 더 가는데, 누군가 기자의 손목을 끌어당겨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한다. “당신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합니다”라며. 기자가 지장을 찍은 계약서에는 ‘퇴직금, 상여금 없음’, ‘4대 보험 가입 의무 없음’ 등이라 쓰여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서 나눠준 종이로 만들어진 급여를 기자에게서 빼앗아 탐욕스레 웃고있는 자본가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실제로 근로를 한 것이 아니어도 당당한 노동의 댓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비정규직노동자의 현실이 더욱 와 닿았다.

■우리 권리 챙기기

호수공원을 돌아가니, 여성노동자의 권리들이 적힌 판이 있다. 해당 권리마다 잘 지켜지고 있으면 ○에, 보통이면 △, 지켜지고 있지 않으면×난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다. 참가한 노동자들의 근로현장은 폭행이나 임금에 관한 권리는 지켜지는 편이었으나, 초과 근로 수당을 받지 못했거나, 계약 갱신 때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얼마 전 호텔 한곳의 비정규직이 집단으로 해고당한 사건이 있었다”고 윤혜령씨가 전한다. 단지 노조를 결성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이기화(45)씨에 따르면 “임신을 하면 어떻게 일하겠어”라고 상사가 은근히 해고 압력을 주기에 결혼을 하고도 일부러 임신을 안하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속 좀 풀자

좀 더 산을 오르니 속풀이 구간이 나온다. ‘요즘 누가 정규직을 쓰나? 비정규직을 써야지’, ‘결혼했어? 임신했어? 당장 나가!’라고 말하는 자본가들이 그려진 포스터가 붙어 있는 판에 모래주머니를 던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만이 모래주머니를 던졌는데, 어느새 아주머니들이 더 열을 올린다.

포스터가 떨어질 정도로 악이 받혀 모래주머니를 던지는 여성 노동자들. 이제 마지막 프로그램이 남았다. ‘차별 없는 세상·여성 노동자 살맛 나는 세상, 우리가 만든다. 움직여야 세상이 바뀐다’라는 글에 스티커를 붙여 색깔을 입히는 것이다. 그 글씨에 스티커를 붙이면서 이들은 직장에서 차별이 없어지기를, 차별을 없앨 것을 다짐한다. 더 굵어진 빗방울 속에서 폐회식을 한다.

3시간 동안 걸으며 여성노동자로서의 차별과 권리를 모두 경험한 이들이 외치는 고함소리는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욱 컸다. 추첨을 통해 선물을 주는 마무리 행사에서 3·8여성상을 걷기대회에 참여했던 남학생이 탔다. “아이를 같이 기르겠다. 직장에서 여직원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남학생의 외침과 함께 여성노동자걷기대회가 막을 내렸다.

“차별을 받은 사람이 침묵하면 안된다. 같이 한 목소리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기화씨의 말과 함께, 딸·아들과 나란히 평등의 길을 걷던 가족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홍미진 기자  lerry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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