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는다고 농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대구의 태양은 오늘도 마지막 결실을 위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서둘러 도착한 시장길 뒤로 보이는 슬픈 표정의 하얀 건물. 바로 이곳에 고 이경해 열사 추모식 때 분신을 시도한, 자신보다 농촌을 사랑했던 또 다른 농민 박동호(33)씨가 있다.

▲ © 한영훈 기자
‘1202호 박동호’, 곧 한숨 소리가 쉬어 나올 것 같은 병실에 그가 누워 있었다. 목 부분이 하얗고 노래서 의아했지만, 곧 불에 녹아 늘어진 붉은 살을 긁어낸 후 남은 죽은 살과 약 때문인 것을 알았다. 박씨 어머니는 애써 어두운 기색을 감추며 우리를 맞았다. “먼 곳에서 오느라 수고가 많다”며 드링크를 기자들 손에 쥐어 주시는 어머님의 얼굴에는 순박한 농촌의 정이 느껴졌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저는 이경해 열사님 마음의 100분의 1도 안 되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는 새참 때의 그 어떤 막거리보다 탁했다. “제 생각이 조금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이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한다고 농촌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라며 또다시 말끝을 흐리는 그의 눈에서, 목표를 상실한 기항지의 한 나그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농촌에서 살기가 어렵겠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아직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듯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아직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도 온전치 않다”는 박씨 어머님의 말에 따라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 한영훈 기자

병실 밖 휴게실에 앉아 있는 이재동(37. 성주군 농민회 사무국장)씨의 표정은 WTO 농업 개방과 ‘매미’로 인한 농가 피해로 더욱 암울한 듯 했다. “농촌 어르신들은 이경해씨와 박동호군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사람이 죽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걱정하신다”며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매미의 영향도 있지만 6월부터 시작된 잦은 비와 다른 해에 비해 줄어든 일조량으로 쌀의 생산량이 3000만석도 안돼 농촌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농민들의 힘겨움이 느껴졌다.

이번 ‘매미’에 대한 대책으로 만들어진 농업 재해 보험에 대해 “절차가 복잡하고 보험 적용 조건이 까다로와 별 도움이 안 된다”면서 “과대 포장용 농업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애들 교육비는 자꾸 올라가고... 안그래도 농민의 수입은 도시민들의 70% 밖에 안된다고 하는데, 그나마 농산물 가격마저 자꾸 떨어지니 지금 농촌에는 빚만 늘고 있는 현실”이라며 “12월이 되면 농협에서 60명씩 신용불량자를 정리하는데 지금 우리 마을에도 짐 들고 도망갈 사람이 600명 정도나 된다”며 울분을 터트렸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 “모두들 농민을 위한다지만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은 없다”는 그의 말에 숙연해 진다. 농가부채, WTO 농업개방, 정부의 안이한 농업정책에 태풍 ‘매미’까지. 아마 그것들 중에서 이번 WTO 농업개방은 눈앞의 어려움도 버거운 농민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농업개방이라는 가시가 아니라도 현 상황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다.

언젠가 그 가시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목까지도 찌를 수도 있다. 국익을 위한 농업 희생 논리를 앞세워 농민들을 궁지로 내몰게 된다면, 농민들은 이익이 나지 않는 벼농사를 포기할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의 아들, 딸에게 ‘황금 벌판’은 역사책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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