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 문화상 당선작 - 소설부문

“안녕.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안녕.”
“힘들면, 애써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일단 어디로 갈까?”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너를 감사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좋을까. 일단 걷자.”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준비해온 말을 문자로 전송해 보냈다.
<답답할 테지만 우선은 이렇게 문자로 말을 할게. 편지로 이야기했던 것, 마음 단단히 먹었어?>
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희미하게 웃는다.
“물론이지. 그럼 조용한 카페라도 들어가자.”
<그래.>
그리고 우리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꿈에서만 그리던 만남, 자연스러운 대화까지 무엇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카페를 들어서고 자리에 앉으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눈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슬슬 말을 꺼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와 펜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소싯적에 수업을 들으며 친구와 자주 나누곤 했던 이야기 방법이다. 글을 쓰고 전달하고, 읽고 다시 전달하고, 말로 하는 대화보다는 늦지만 마음 깊이 느껴지는 진동은 더 깊다.
나는 웃었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 너와 이야기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저주받은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기적. 만약 내가 말을 한다면, 지금처럼 이상하게 뒤틀리지 않고 올바로 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파르페 하나 하고 카페모카로 주세요.”
파르페는 말로만 들어본 음식이었다. 오랫동안 연애를 했던 친구가 데이트 할 때면 항상 주문하는 것이라고, 혹시라도 나에게 그럴 날이 오면 먹어보는 게 좋아 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제 내 인생의 첫 데이트를 하고 있으니 그 기념으로 먹고 싶어졌다. 항상 즐겨듣는 The Beatles의 음악처럼, 나뭇잎 위에 내려앉은 눈뭉치가 사르륵 흘러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선택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뜨거워져 갔다. 볼이 달아오르고 심장 박동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너무나도 기쁘다.’ 라는 감정이 점차 마음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에 취한 듯 점차 의식이 군데군데 끊기는 것 같았다. 너무도 많은 기쁨이 내 기억과 정신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난 지금에 와서 기억이 나는 것은 웃고 있던 너의 얼굴과 가득 부어오른 내 눈이다.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부어올라서 앞을 보기가 힘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점차 어젯밤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장면은 떠오르지 않는다. 머리가 깨어질듯 아프다.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가 되었고 여덟 시에 다가가고 있다. 누나는 아직 자고 있지 않는지 컴퓨터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다. 뭔가 이상한 음이 들린다. 헛기침을 하는 듯한, 폐 가득 공기가 들어가 목구멍으로 숨이 비집고 나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불안해졌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멍하니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시뻘게진 눈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다. 온몸이 아프면서도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지 팔다리를 제멋대로 뻗대고 있다. 눈의 초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지도 않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도 너무나 힘든지 구석에서 벽을 보며 가쁘게 심장을 움직이고 있다.
나는 누나에게 가서 손짓으로 녀석이 이상하고 했다. 숨을 못 쉬고 있는 건지, 피가 몸 전체에 전달이 안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잘못 된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눈으로 누나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어서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외쳤다. 나는 병원이 지금 문을 연 것 같지도 않고 혹시라도 옮기는 도중에 죽는다면 그게 두고두고 더 괴로울 거라고 눈으로 마음으로 전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죽음을 홀로 맞이하는 건 아픈 일이다. 고통 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받은 예정된 아픔 속에서 죽어야하는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편안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녀석의 저주를 알고 나서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죽음도 그랬으면 하고 바랬다.
누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녀석을 바라보지를 못하겠는 듯, 그래도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슬픈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는 누나의 큰 눈망울을 기억했다. 나에게도 저렇게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가는 도중에 죽을지도 몰라. 단단히 각오하도록 해.>
나는 그렇게 적어 보여주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아직도 머리가 깨어질듯 아프지만 캐리어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몸부림에 점차 정신이 또렷해졌다. ‘죽지마라, 아직 너는 죽을 때가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녀석이 든 캐리어를 들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옆에서 뛰어오는 누나는 도저히 녀석의 몸부림을 느낄 수 없겠는지 조금 뒤쳐져 따라왔다. 마침내 눈앞에 병원이 보였다. 간간히 뒤척이던 녀석이 갑자기 캐리어를 떨어뜨릴 정도로 강하게 움직였다. 그 때, 내 귓가에 녀석의 단말마가 들리는 듯 했다. 녀석의 마지막 몸부림이―생의 마지막 순간에 전해진다는 파동이―확실히 내 손을 타고 전달되었다.
병원 문을 열려는 누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이미 죽었다고, 더 이상은 가쁘게 움직이는 녀석의 몸을 만질 수 없다고 했다. 누나는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가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며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병원의 문은 닫혀 있었다. 24시간 할 거라고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누나는 그 기대가 깨지자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서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고, 누나는 절규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머릿속에서 The Beatles의 Hello, Goodbye가 살며시 흘러내렸다.
넌 이제 가려 하겠지만, 나는 너를 보낼 수 없어. 그래도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 하는 시간이구나. 잘 자라. 지난 시간동안 참으로 아름답게 너의 인생을 보냈단다. 잘 자거라. 사랑하는 나의 친구인 다미야.

이 아픔, 이제야 기억이 났다. 캐리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부정하고 싶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다미 덕분에 떠올려 버렸다. 나를 지우고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아팠던 지난밤의 기억을, 그 끝에 계속 머물러 서 있지 않고 지금 당장 끝을 맺어야 한다.
나는 불행과 저주 속에 살아갈지라도 너는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누구도 너를 더럽힐 수 없고 누구도 너를 부술 수 없어. 너의 모든 더러운 암흑은 내가, 이 몸으로, 이 마음으로, 이 저주받은 힘으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힘은 생겼다. 죽음을 맞이하고도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다미의 모습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웃는다. 얼굴 가득 비웃음이 가득해서 참을 수 없다. 거울은 ‘이게 네 녀석의 전부다. 받아들이도록 해. 어디로도 도망 갈 수 없어.’ 라고 말했다. 나는 바보인가. 너에게 저주받은 나 같은 존재는 영원히 추방시켜 버리려고 했는데도, 나는 손을 내밀어 네가 잡아주길 바라고 있다. 이 얼마나 바보 같고,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마음인가.
찢을까? 생각했다. 찢어도 된다. 추악한 나의 마음이 너에게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찢어버리고 없애버리자. 편지를 쥔 손가락에 가득 힘을 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은 조금씩 편지 윗부분을 찢으려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찢겨져 버리겠지.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여러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도 많은 장면이 한 번에 겹쳐져서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장면, 새빨갛게 달궈진 뭔가가 내 어깨에 닿는 장면, 온몸을 미친 듯이 긁고 있는 장면, 교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을 향해 울며 소리치는 장면,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무수한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까지 그저 스쳐 지나간다. 그 중에서도 네가 환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는 장면만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 나는 너와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만나고 또 만나면 정신을 잃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질까봐 두렵다. 무리하지 않고 살아가다보면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것만큼은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우리들 이제 그만하도록 하자. 너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은 눈물이 날정도로 내 인생에 두고두고 남을 추억이야.
창문 너머로 함박눈이 내리는 게 보였다. 벌써 한 해가 지나가고 있다. 다음 주가 되면 크리스마스가 되고 그 너머에는 신년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인생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암흑으로 가리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거기에는 나는 있지만 너는 없다는 것이다. 다미가 거기에 없듯이 너도 거기에 없다. 되돌릴 수 없는 진실만이 내 마음 속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우리에게 다음 주가 있고 그 후의 다음 주가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이런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의 대화는 항상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받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타인의 부담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저주받은 능력 때문에 온전한 대화를 바란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사치이지 않아. 그러니 그저 바라기는 하되 기대하지는 말아야 하지.
나는 어긋나 있다. 나라는 인간은 처음부터 뒤틀려 있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인간이다. 남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모순적인 사람이야. 그런 의미에서 네가, 다미야 네가 부러웠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네가 그리웠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에 너를 계속 탐하고 탐했다.
꿈을 꾸었다. 언젠가는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날이 올 거라는 꿈을 꾸었다. 어떤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거침없이 말할 수 있을 날이 온다고 그 날만을 기다리는 나를 꿈꾸었다. 희망에 가득차서, 세상을 증오하지 않고 자신을 증오하지 않으며 오직 그 날만을 고대하는 나를 꿈속에서 바라보았다.
잔혹한 현실은 꿈 이후에 남아있다. 현실은 꿈을 따라가지 않고 끊임없이 네 자신의 뼈에 새긴 하나의 진실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진실로, 현실은 무척이나 차갑다.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살갗을 에는 차가운 바람과 흩날리는 눈가루가 들어왔다. 이불로 허벅지를 덮으며 의자에 앉았다. 하늘은 흐린 회색으로 가득 칠해져 있고, 집 앞에 있는 나무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컴퓨터를 킨 후 노래를 틀고, 분위기를 가만히 느낀다. 말을 할 수 없기에, 이 마음을 전달하는 역할은 글이 맡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궁리 끝에 편지가 아닌, 긴 이야기가 담긴 한 편의 소설로 너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하기에 이제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매우 긴 글을 쓸까 한다. 어쩌면 이를 통해 너는 나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는 함께 내일로, 내일로 걸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단어를 고르고 있다. 너를 생각하고 너를 바라보며 이렇게 글을 이어 나가고 있다. 나를 똑바로 쳐다보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문장에 또 다른 한 문장을 더해 글을 완성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마지막 문장을 쓰며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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