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 문화상 당선작 - 소설 부문

시큼한 침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입이 바짝 말라있어 코로 숨을 힘겹게 내쉰다. 아직 살아있다. 눈을 감고서 몸의 감각을 하나 둘 느낀다. 거칠게 심장이 뛰고 손가락에 와 닿는 딱딱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증이 슬쩍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매주 쌓이는 하얀 봉투와 노란 편지지. 뚜렷한 색 만큼이나 선명하게 내 마음이 비치고 있을까. 의문만이 마음에 덩그러니 남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대, 이 마음이 확실히 전해지고 있나요?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이나 마음도 멀어져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 짤막하게 되돌아오는 너의 편지로는 알기 어려웠다. 그건 어제 일이었지. 편지를 읽고, 진하게 밀려왔던 두통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언제쯤 여유롭게 될 지는 아직도 미지수. 다음에 연락할 때까지 즐거운 나날을 보내!>
이런 짤막한 인사말만 담겨있었다. 그래도 나는 기뻤어. 내 질문에 한마디라도 답해주는 너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이 마음이 전해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리고 슬펐지. 어쩌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일요일, 은은하게 퍼지는 일몰의 여운을 눈에 가득 담고서, 황홀한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마음으로 편지를 써 너에게 보내려 했지. 편지지를 사며 일몰 색과 비슷한 주황을 찾아보려 하다가 손가락이 노란색을 가리켜 그대로 사버렸어. 어떤 색이라도 상관은 없을 텐데, 너에게 쓰는 편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노랑을 고집하게 되는 걸까.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 깊이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태양을 새겼다. 그리고 펜을 들고 써 내려가면서 잉크가 흩뿌리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그대로 묻혀 흘러나가길 바랬다.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했어. 너에게는 그런 게 어울리니까. 그런데 막상 편지를 쓰려고 자리에 앉으니 도저히 써지지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써지지 않아. 펜을 든 손을 내려놓고 멍하니 닫혀있는 창문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창문의 문양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의 요란한 움직임은 아름다웠다. 창문을 열어젖히자 포근한 바람이 온몸에 와 닿는다. 신선하고 부드러운 아침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한숨 잘까.’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는 시기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시간이다. 하지만 균형을 깨뜨려지는 건 앞으로 며칠, 몇 주가 지나가버린 후이다. 그때가 되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포근하다고 여기며 창틀 사이에 비치는 부드러운 빛에 나른한 얼굴로 있을 수는 없게 되겠지. 덥지도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지금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아슬아슬한 추의 모습과 같다.
눈의 가장자리를 타고 신경을 자극하는 하얀 빛이 눈두덩에 닿아있다. 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네가 그 너머에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확고한 마음이 여기에 있다. 어떤 것이 막고 있더라도 이 너머에 커다랗고 따듯한 무언가가 나를 비추고 있음을 아는 확고한 마음이 여기에 있다.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무언가가 빛을 가로막고 있다. 나보다 더 앞에서 부드러운 빛을 온몸으로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조심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지 쳐다보았다.
고양이다. 검고 흰 고양이가 창턱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다. 반쯤 풀린 눈망울을 하고 앞발로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그렇게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라고 생각했다. 저 녀석을 쫓아내야 할까? 밖에서 창문을 올려다보면 고양이가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인다. 길을 걸어가다가 고양이가 그 특유의 동글동글한 눈으로 보고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고,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보고, 만지고, 먹이를 주지만 저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 보는 고양이의 눈은 섬뜩한 기운을 넘어서 손에 와 닿는 느낌마저 낯설 정도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포가 살갗을 파고든다. 무엇을 하는지 감시하는 눈으로 동작 하나하나에 유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먹이라도 줄 낌새면 금방 내려와 발목에 몸과 꼬리를 차례대로 부딪치며 간지럽게 애교를 부린다. 그러다가 정말로 먹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면, 새된 목소리로 앵앵거리며 운다. 배고프다고 어서 먹이를 주라고 보챈다.
한참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던 그 녀석은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본다. 종종 눈을 크게 뜨기도 하고 뒷발이 가려운지 혀로 핥기도 하면서도 창턱에서 떠나지 않는다. 따뜻한 태양빛은 길게 기지개를 펴며 축 늘어진 고양이를 비추고 눈이 자꾸 감기는 나에게 전해진다. 한가로운 아침이 지나가고 있다.
한두 시간 쯤 잤을까. 일어나려 몸을 뒤척이니 옆구리에 묵직한 뭔가가 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거기를 보니 녀석이 가만히 웅크리고 자고 있다. 곤히 잠든 모습이라 깨우지 않도록 가만히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에 와 닿는 고양이털의 감촉이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렸다. 이내 꼭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녀석을 쳐다보고 있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계속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지 목을 부르르 떨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육 개월 전이었다. 누나가 회사 지하 주차장에서 고양이 새끼를 거둬 집에 데려 왔던 때가. 전부 세 마리가 태어났는데 그 중에서 막내라 거둬들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누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첫 날에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먹이를 줘도 먹지를 않아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누나는 인터넷을 한참동안 검색하다가 고양이용 우유를 사와 거기에 먹이를 넣어 희석시켰다. 마치 죽처럼 보였다. 녀석은 잠시 코끝으로 냄새를 맡다가 이내 혓바닥을 조심스레 내밀어 맛을 보았다. 며칠이 지나고 예방접종을 하러 병원에 다녀왔던 누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심장 기형이라고 하더라. 오래 살 수 없대.’라고 말했다.
어릴 때는 상관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몸의 성장에 심장이 따라갈 수 없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너무 커서 박동을 해도 온 몸에 피가 전달되지 않는 그런 병이라고 했다. 갑자기 심하게 흥분하면 심장이 뛰다가 정지해버리는 심정지나 신진대사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산소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어떻게 하더라도 극심한 고통에 죽는 게 대부분이라고, 그러니까 이 고양이를 키울 거면 매일 죽음을 각오 하시는 게 좋다고 수의사가 말했다고 한다. 집에 있는 다른 고양이와 비교해보니 확실히 심장이 뛰는 게 달랐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크게 녀석의 심장은 움직였다.
녀석은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가면서 점차 힘이 생겼다. 잘 뛰지도 못했는데 며칠이 지나자 침대를 오르고 의자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옷장 위에 올라가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렇게 녀석이 힘을 얻고 정상이 되어 갈수록 정말로 기뻤지만 반대로 늘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야 하는, 치유할 수 없는 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저주받은 삶을 저 녀석에게 선사한 누군가를 원망하곤 했다. 그래, 나에게도 저주받은 삶을 선사한 그 누군가를 원망한다.
‘전지전능한 그대여. 어째서 나에게, 그리고 이 약하고 불쌍한 아이에게 온전함을 주지 아니하고 아픔 속에 살게 하셨나이까?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또한 저주하나이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자 잠이 멀리 달아나버렸다. 지금 쓰지 않으면, 이 안타까운 기분을 그대로 전할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펜을 잡고 노란 편지지에 다시 편지를 써내려갔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