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만취한 운전자의 차가 당신을 덮친다. 그로 인해 당신이 드라마의 누군가처럼 어느 날 갑자기 황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진저리쳐질 만큼 흔한 설정이다. 그래, 물론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존재 말이다.

요즘 세상에 ‘죽음’은 내가 밟고도 모르고 지나가는 개미처럼 너무 따분하고 하찮은 존재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죽음은 때로는 몽환적인 것으로 때로는 아주 가벼운 것으로 때로는 귀한 것을 얻기 위한 대가 정도로 묘사된다. 한국인에게 죽음이란 것은 ‘웃겨 죽겠다’, ‘더워 죽겠다’처럼 삶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일반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너 죽을래?’라는 말이 장난처럼 들린다. 대답으로 ‘죽여봐! 죽여봐!’도 대수롭지 않다.

기자는 지난 주 친구 아버지의 빈소에 다녀왔다.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웠다. 빈소로 향하는 승강장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전동차가 날 덮칠 듯한 기세로 들어왔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느끼는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공포. 내 목숨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목숨도 파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의 문명과 기술이 교만의 콧날을 세워도 결국 모든 것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요즘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만 봐도 알 수 있듯 죽음은 예측할 수 없어 두렵고, 그래서 우리는 쉬 망각한다.

이 봄날에 죽음으로 한껏 주눅 들어 방바닥을 긁으며 신세 한탄하라는 말이 아니다. 정신없이 바쁜 이 세상에서 죽음을 아는 사람이 지혜롭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남은 날을 계산할 수 있는 자가 가장 지혜롭다.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은 1분조차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을 던진다. 죽음이 닥친 그 순간조차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모든 일에 목표가 희미하다. 작은 일에 대노하고 큰일에 소심하다. 변화가 없고 답답한 삶을 그냥 연장하고 있을 뿐이다. 순간순간의 가치를 몰라서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혹은 ‘나중에’를 연신 외치면서.

잘 살고 싶다고 토익을 바득바득 공부하지만 왜 더 크게는 보지 못하는가? 기를 쓰고 죽음에 대해 묵상하면 인생을 보는 시야가 달라진다. 유언장을 써보는 것이 좋다면 유언도 써보고 관에 들어가는 상상도 할 수 있거든 실컷 하자. 덧붙여 한 마디. 내가 아는 한 후배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인생이 허무해요. 단지 죽음이 두려울 뿐…”라며 한숨을 푹푹 쉰다. 내가 하고픈 말은 딱 하나다. “영원한 것을 찾아 올인해!” 더 이상의 말은 노코멘트!

만개했나 싶더니 어느새 벚꽃이 스러져 간다. 이렇듯 자연은 한정된 것이고 죽음에 대해 늘 교훈을 주건만 어찌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자처럼 오늘을 사는가?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면 언젠가 이곳에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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