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 문화상 소설부문 심사평

 전체적으로 외국인, 혹은 외국인에 준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여 우리 사회의 세계화를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수준들이 작년과 비교하여 엄청나게 좋아졌다. 그래서 기뻤다. 당선되지 않았어도 끊임없이 정진하면 좋은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응모작들을 일별해 보기로 하겠다.
  <백금반지>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이 보이고 묘사나 설명 모두 나무랄 데가 없다. 진부한 일상을 이렇게 형상화해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쉽다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미라는 것이 단순히 우스갯소리만 잔뜩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이다. 잔잔한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위기와 절정이라는 소설 문법이 빠져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네번째 손가락>의 경우는 회상에 맞춰 시점을 이리저리 바꾸는 솜씨도 뛰어나고 문장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모습이 역력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주제의식에서 분명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다. 잘라진 손가락과 성한 손가락 사이의 격차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한 걸까. 사람은 그렇게 잃어버린 완전한 유토피아와 결코 만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의 존재가 단지 이러한 성찰을 위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해 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라는 인물의 구체성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왜 그녀는 떠났을까. 단지 서로가 서로에게 이방인이기 때문에 떠났다는 것은 그녀를 그러한 명제적 존재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액자 밖의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가 단순히 듣는 존재가 아니라 액자안의 어떤 사실과 어떤 관계로든지 연루되지 않으면 ‘나’의 액자 밖 설정은 별 의미가 없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는 파란 눈이라는 이미지가 반복해서 그려지고 있다. ‘파란 눈’이라는 이미지는 <네번째 손가락>에서도 보이는데 이 소설 역시 그렇다. 파란 눈으로 인하여 고통 겪었던 한 사내와 한 여자의 만남. 상당히 잘 쓴 소설이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은 해독이 잘 안되고 또 해독이 된다 하여도 사족 같다.
  <그녀는 마네킹>은 마치 <미녀는 괴로워>를 보는 것같다. 소박하고 아담하다. 그렇지만 소설적 필연성은 별로 없고 내용도 단순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해부하는 소녀>는 묘사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낯선 소녀가 남의 집에 스스럼 없이 들어올 수 있게 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또 개구리를 해부한다는 것이 가끔씩 가슴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메시지의 비중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 소녀가 100일이 되자 안 오는지, 왜 딱히 100일인지 설득력이 없다.
  <순례자들>은 너무 파편적이어서 봉합이 잘 안된 느낌이다.
  <그림자공주>란 작품에서 나는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끌어가는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콩쥐팥쥐라는 전통서사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패러디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왜냐 하면 형식을 이미 가졌기 때문에 형식에 대한 엄청난 고민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의 형식을 비틀고 새로운 이야기를 넣으면서 그 이야기가 주는 힘을 만들어낸 저력은 남다른 바 있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민다. 정진을 빈다.

김진기(문과대ㆍ국문)교수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