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 문화상 당선작 - 소설부문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버지가 언니에게 하는 행동은 어머니의 무거운 마음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언니에게 딸 이상의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언니에게서 죽은 전처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것 같다. 분명 자신의 친딸이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언니에게 아버지가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마음속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를 볼 때면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내 어머니의 고운 얼굴을 한 번 만이라도 제대로 바라보아 주었다면, 어머니의 하얀 손을 한 번이라도 따듯하게 잡아주었다면 나는 아버지를 용서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 속의 기대조차 이루어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첫 번째 딸에게만 너무도 따듯한 눈빛과 따듯한 손길을 건네주었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그 안쪽에서는 심하게 비틀려 있어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족 관계가 유지 된지 12년이 넘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 시간 동안 예전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열정을 쏟으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12년을 넘게 간직하셨던 사랑의 열병이 도를 지나쳤는지, 아니면 어디선가 예기치 못한 질병의 씨앗을 삼키셨는지 아버지는 병에 걸리셨다. 아버지는 병 때문에 신체가 힘을 잃자 눈에 띄게 약한 모습을 보이셨다.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시고 곡기도 잘 넘기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쇠약해져만 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자책하시면서 절망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은 바로 언니였다. 아버지는 15살이 된 자신의 어린 딸에게 너무나도 크게 의지하셨다. 항상 웃는 낯으로 모든 일을 쉽게쉽게 처리하고 결코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약한 모습이 나는 너무나도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보다는 어머니가 훨씬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으셨을 것이다. 자신의 어린 딸의 앙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이미 죽어버린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남편의 모습을 보는 부인의 마음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울지도 않으셨고, 아버지를 탓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수발을 충실히 드셨고 쇠약해 지셔서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버지 앞에서도 단 한 번도 단정하게 자신을 꾸미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껴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쇠약해지기 전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아버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천상의 여인을 미워해야 했으며, 쇠약해지고 나서는 자신보다 10살은 더 어린 자신의 어린 딸에게 여자로서 질투를 느껴야 했다. 어느 쪽이 더 나을 것도 없었고 더 절망적일 것도 없었다. 애초에 아버지의 마음속에 어머니가 자리 잡을 공간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아마도 나는 이때 약간이지만 어머니가 언니에게 느끼는 여자로서의 미묘한 감정과 질투를 감지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언니는 충분히 여자로서의 매력을 발산할 정도로 성숙 했었고, 아버지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언니를 한 명의 여자로서 여기시고 그녀 품속의 따듯한 체온을 더 바라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비틀려 버린 관계 속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관조하는 위치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들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니에 대한 내 감정이 단순한 관조에서 벗어나는 시기가 이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점차 쇠약해지시다가 결국 언니의 손을 붙잡고 괴로운 표정으로 앓으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언니와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고,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아버지로서 주었어야할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가 끝까지 자신을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음에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렸다. 아마 내 생각에 어머니의 그 눈물 안에는 분명 많은 것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내 어머니의 애처로운 눈물을 보며 또 다시 그녀에 대한 연민을 느껴야 했다. 한 번도 남편에게 사랑받아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딸에게도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보지 못했던 어머니였다. 14살이 된 나는 그런 어머니를 여자로서, 딸로서 연민하고 동정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 손을 꼭 붙잡으시며 그 고운 얼굴에서 눈물을 흘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