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여일의 촛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다(혹자는 아직 끝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촛불이 이리 허망하게 사그라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의 추가협상(비록 허접하지만)으로 만족해서, 100일이라는 긴 시간에 지쳐서, 정부의 탄압에 위축돼서 등의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회전반으로의 촛불 진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촛불집회도 ‘우리’ 보다는 ‘내 가족’의 문제였기에 공감을 이끌어낸 측면이 크다. 쇠고기 외에 그나마 공감을 받았던 문제가 '내 자식'과 관련될 교육문제와 대운하라는 환경문제였고,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장애인, 없는 자의 외침은 그곳에서 조차 철저히 무시를 당했으니까.

촛불이 왕성할 때 한껏 움츠렸던 정부와 보수언론은 촛불이 세분화되는 양상을 보이자 반격을 시작했다. "이건 너와 상관없는 문제야." 그들은 노동자와 자본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수도권과 지방을, 청소년과 성인을 나눠 국민을 세분화한 후 분열을 시도했고 미국산 쇠고기로 일치단결하던 우리는 결국 흩어져 각개 격파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고스란히 대학에서도 나타난다. 대학은 교수와 학생을, 전임교원과 시간강사를, 유망학과(돈 되는 학과)와 사양학과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눠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구성원들을 철저히 소외시켜 학생을 대학에 돈을 내고 교육만을 받는 '수혜자'로 전락시켰다.

학비가 없어 목숨을 끊는 동년배의 소식에도, 학과 통폐합에 반대하며 강의실 밖으로 나온 학생과 교수님들의 모습에도 우리는 사분오열로 흩어져있다. 3년전 구조조정에 이어 또다시 대학 멋대로 추진하는 학과통폐합에 반대하는 외침은 '그들의' 세상물정 모르는 이기주의로 매도될 뿐이다.

공대기준 일년에 900만원이 넘는 학비는 허울뿐인 협의체로 구성원들과의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인상되지만 살인적인 취업경쟁에 내몰렸다는 이유로 우리는 등록금마저 '내'일로 여기지 않는다. 아니 '내'가 나서기는 싫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생활비라도 보태려 주말마다 밤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조차 제 주장 펴기를 거부한다.

'연대'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나'보다 먼저 희생당하는 '너'와 함께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를 지키는 일이 아닐까. 지금 방관자로 있는 '나'와 '당신'에게 언제 차례가 돌아올지 모르니까. 권리는 방관하는 자와 함께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