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신문> 문화상 당선작 - 소설부문

창공을 가르는 노스웨스트 항공기에선 별이 보이질 않는다. 밤 비행기의 고즈넉하고 따분한 공기. 여자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개운치 못한 잠자리를 원망하며 토마토 주스를 마신다. 핸드백을 열어 여권과 한 뭉치의 달러를 어루만져본다.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여자는 뻑뻑한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본다. 여자는 태어나서 아무것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엄마도 없었고 집도 없었다. 유일하게 그녀를 사랑했던 아버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자는 자신이 소유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직 무언가를 끝없이 원하면서 텅텅 비어갔다. 아버지 등에 업혀 맡았던 아찔한 아카시아향이 떠올랐다. 여자는 아버지의 등을 기억한다. 따스하고 축축한 등이었다.

여자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가질 수만 있다면 그 순간을 영원까지 가져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모가지가 떨어진 목련처럼 허무함만 뚝뚝 떨어졌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여자는 노점상 좌판에 늘어진 귀걸이를 구경하다 무심코 귀걸이를 한 채로 집에 돌아온다. 아무도 몰랐다. 다음날 여자는 또다시 그 좌판에서 귀걸이 한 쌍을 움켜쥐고 무작정 길을 걸었다. 터질 듯 뛰는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 여자는 누군가 달려오진 않을까 두려워서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집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는 처음으로 자신을 버린 엄마생각을 했고, 사라진 아빠생각을 했다. 여자는 처음으로 기뻤다.

맘만 먹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자는 더욱 대담해졌고, 여자의 손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온갖 종류의 세상물질들이 그녀의 손에서 모였다 사라졌다. 여자는 많은 돈을 아버지를 찾는데 썼다. 그러나 아버지는 질량도 무게도 없는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 다시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이제 곧 비행기가 착륙하려는지 귀가 먹먹하다. 깊은 바다 속에 떨어진 쓰레기처럼 너덜너덜한 느낌이다. 여자는 창밖을 멀찍이 바라본다. 점멸하는 불빛들이 대지위에 알알이 박혀있다. 여자는 저 땅 어딘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여자의 눈이 감기고 비행기는 건조한 대지를 향해 바퀴를 밀어내고 있었다.

여자는 제일 먼저 대전을 찾았다. 그녀와 흰 얼굴의 동생이 함께 가슴에 묻었던 작은 아버지의 묘를 찾았다. ‘김창기’라는 낡은 세 글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여자의 아버지가 사라지고 세 사람은 함께 살았다. 병원에 갈 수 없어 병명도 모른 채 죽어간 김창기는 여자에게 얼굴이 흰 여동생 하나를 남기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김창기의 묘는 생각보다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묘지관리인에게 들으니 누군가가 관리를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여자는 오래전 헤어진 동생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여자는 푸르게 깎인 묘 앞에 서서 떠나던 그날을 생각한다. 여자의 도벽이 날로 심해져 가던 그 때, 여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던 동생에게 모아둔 모든 돈을 남겨주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데는 무성한 소문이 오갔다. 미군에게 시집을 갔다고도 하고, 더 넓은 땅에서 명성을 떨치며 도둑질을 하기 위해 떠났다는 한간의 소문도 있었다. 어쨌든 여자는 떠나던 그 날 아침 김창기의 묘를 찾았다. 김창기의 묘 앞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아버지를 꺼내 김창기의 머리맡에 나란히 묻었다. 흔적도 없이 증발한 아버지는 그녀의 가슴속에서 사라지며 시커먼 진창을 남겼다. 아버지를 덜어내는 일은 참으로 지저분한 일이었다.

남자는 월평중학교 수학교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자는 우묵한 눈과 커다란 귀를 가지고 있었다. 얇은 입술의 남자는 첫인상이 좋았다. 남자는 차 안에서 자신이 그 묘를 깎았다고 했다. 그리곤 말했다. 장인어른의 묩니다. 여자의 두 눈은 내리는 비를 연신 훔쳐내는 자동차 와이퍼에 가 박혔다. 좌우로 움직이는 와이퍼 너머로 흰 얼굴의 여자가 뛰어오는 것이 보인다. 남자가 말한다. 저기 와이프가 오네요. 여자는 한동안 눈조차도 깜빡이지 않았다. 멀리 벽돌색 건물에 ‘김산부인과’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남자가 말한다. 와이프가 의사거든요. 여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 앤 정말 똑똑했거든요.

빗소리가 차창을 때리는 소리에 여자는 눈을 감는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여느 날처럼 멍하니 현관을 서성이다 사라져버린 그를. 여자와 아버지가 김창수의 집에 머문 지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김창기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도 있어요. 형. 형이 집을 나간 후 누군가 망치를 들고 우리 가족을 산산조각 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잘 못 되기 시작했어요. 형 나가구 어무니는 충격으로 쓰러지구, 아부지 갑자기 중풍인지 뭔지 때문에 드러 눕구, 내가 혼자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용을 썼는데 그게 잘 안됐어. 집두 팔구 했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구요. 벌써 십삼년도 넘은 일이네. 나는 가슴속에 어무니 아부지두, 형두 묻은 지 오래였어. 작은 아부지가 그나마 서울 사는 형님네로 가시면서 이 집을 우리 살게 해주셔서 이리로 이사를 왔는데,,, 이런 말 전해서 정말 미안해. 형. 형. 내말 듣구 있어? 형.

여자는 봉숭아 꽃잎을 빻아 손톱 물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마당에서 봉숭아를 빻고 있으면 새빨갛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리곤 텅 빈 주전자를 마당에 집어던지곤 했다.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가 굴러다니는 마당에서 아버지는 축구를 하듯 양은 주전자를 뻥뻥 찼다. 아버지는 울기도 했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 김창기는 곰팡이가 핀 것 같은 푸르스름한 얼굴을 하고 아랫목에 항상 누워있었고 여자는 목련꽃잎과 아카시아 이파리, 철쭉 같은 꽃잎들을 따다 쿵쿵쿵 빻아댔다. 쿵쿵쿵 소리와 짓이겨지는 꽃잎향이 어우러져 여자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한 날은 더욱 세게 꽃잎을 빻았다. 언제부턴가 여자는 맨 정신의 아버지 얼굴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정신없이 고꾸라지고 길 위에서 얻어맞았으며 짓이겨진 꽃잎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동네 아이들이 병신의 딸이라고 손가락질하게 된 어느 날, 허공을 응시하던 아버지는 어디론가 흘러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투둑. 툭. 빗방울 소리가 오래전 꽃잎 빻던 방망이질 소리처럼 들린다.

-언니. 다 왔어요. 여기예요.
동생부부가 앞장서 들어간 깨끗한 건물은 9층짜리 건물이었다. 베이지색 문들이 차곡차곡 열려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흙냄새와 비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개원한지 얼마 안 된 곳이라 깨끗해요. 전에 계시던 곳에서 모셔왔어요.
-어떻게 찾은거야?
-할아버지 성함으로 센터에 들어가 계셨더라구요. 할아버지 성함 맞죠? 김권철.
-널 알아보셨어?
-그게, 저, 절 언니인줄 착각하고 계세요. 평소에는 거의 못 알아보시는데 가끔 정신이 드시는지 절 ‘딸’이라고 부르시더라구요. 들어가 보실래요?

901호. 굳게 닫힌 베이지색 문 앞에선 여자가 심호흡을 한다.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 복도를 서성이다 여자는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도저히 못 열겠어. 여자가 말한다. 그래도 열어야겠지? 페인트칠이 채 마르지도 않은 새 건물의 향기가 코끝을 파고든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 너머에 그가 있다. 짧게 깎은 머리를 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의 아버지가.

여자의 뱃속에선 아이가 자라고 있다. 태아는 머리가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긴 꼬리를 달고 있다. 여자가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고 있는 동안 작은 물고기의 모양을 한 아이의 심장과 혈관, 내장, 근육은 악착같이 생겨나고 있었다. 여자는 소변을 적신 테스트기를 들고 한참을 변기위에 앉아있었다. 몇 시간을 앉아 있었는지 엉덩이가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여자는 얼얼한 엉덩이를 일으킨다. 바지를 추켜 올린 여자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햇수로 5년이었다. 제이슨과의 결혼생활은. 제이슨은 눈썹이 짙고 머리숱이 적은 한국인 입양아였다.

여자는 결혼식 날 제이슨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면사포는 니가 써야겠다. 여자는 그의 머리가 서른도 채 되기 전에 벗겨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는 결핍이 많은 남자였다. 그를 낳은 부모의 결핍, 애정결핍, 머리칼의 결핍. 그리고 정액의 결핍. 제이슨은 정액과소증이었다. 여자는 결핍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여자는 남편이 만들어내는 작은 알들이 부화하고 자라나 그녀의 뱃속을 가득 채우길 원했다. 여자는 할 수 있는 만큼 그녀의 분신을 세상에 잔뜩 퍼뜨리고 싶었다. 제이슨이 사출해내는 극소량의 정액은 불임의 원인이 되었고, 여자는 매 달 수정되지 못한 알들을 세상 밖으로 퍼뜨리며 이혼을 결심했다. 오래전 그녀의 손으로 움켜쥐었던 타인의 물건처럼, 여자는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싶었다. 텅 빈 자궁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혼 직전, 제이슨의 0.5cc 정액에 담긴 정자들은 죽을힘을 다해 여자의 바다를 헤엄쳤을 것이다. 사경을 헤매며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채. 임신 13주. 여자는 자궁이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느낀다. 여자의 하복부에 살이 붙어가는 동안 태아의 얼굴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두 개의 작은 돌기였던 검은 눈동자에는 눈꺼풀도 생겼고 귀도 머리 양 옆에 놓여졌다. 태아는 여자의 뱃속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츠려가며 자신의 피부를 감싸는 신선한 양분을 느낀다. 여자는 흰 얼굴의 동생부부에게 얹혀살면서 동생이 일하는 김산부인과로 향했다. 동생은 초음파 검사를 하며 태아의 전립선을 찾아 보여주었다. 검사가 끝난 후 여자는 인근 슈퍼에서 사탕 한통과 흑설탕 한봉지를 구입한다. 참을 수 없는 당분에 대한 갈망을 이기지 못한 여자는 숟가락으로 흑설탕을 퍼 먹으며 배를 살며시 두드려 본다.

눈과 귀가 채 여물기도 전부터 태아는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엄지손가락을 빨며 울상을 지어본다. 비록 눈꺼풀은 떠지지 않지만 가끔 눈이 부신 날에는 미간을 찡그리곤 한다. 여자는 자궁이 배꼽까지 올라붙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신장과 방광에 압박을 받아 아무도 모르게 소변이 새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자꾸만 숨이 차고 발이 붓는다. 여자는 검사가 끝난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후.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구나. 아가야.

붉고 쭈글쭈글한 태아의 몸통에 살이 붙기 시작한다. 살아남아 지리라는 안도의 한숨과, 열망으로 가득 찬 몸뚱아리는 천천히 몸을 회전시켜 본다. 여자의 혈관에서 혈액이 흐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태아는 양수를 마셨다가 뱉고 입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그 즈음 여자는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배와 다리, 가슴이 몹시 가렵다. 푸른 혈관이 태반으로 양분을 옮기는 동안 여자는 허옇게 튼 피부를 벅벅 긁어댄다. 퇴근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묻는다. 얘. 나 왜 이렇게 가렵니. 여자의 손톱자국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피부를 본 동생은 연고를 꺼내오며 말한다. 원래 다 그래, 언니. 임신 증상중의 하나니까 약 바르고 진정시켜보자. 손가락으로 살살 연고를 발라주는 동생을 보며 여자는 말한다.

-넌 애 안 갖니?
-우린 결혼 전에 그러기로 합의 봤어.
-야, 자식 없으면 노년이 얼마나 서글프고 추한지 아니? 웃기지 말고 애 하나 갖자고 해.
동생은 연고를 바르던 손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조용히 말했다. 언니. 나 애 못 가져. 여자는 부푼 배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동생을 쳐다본다. 기묘한 적막감을 깨뜨리며 동생이 말한다. 우리 엄마 나 낳고 자궁암으로 돌아가셨어. 나 난관염도 심하고 자궁 근종도 있어. 애 같은 거 오래전에 포기했어. 말을 마친 동생이 희미하게 웃으며 난 괜찮아. 라고 덧붙인다. 여자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할 말을 잃었는지 말을 잇지 못한다.

태아의 콧구멍이 열렸다. 아직은 폐에 공기가 없어 숨을 쉬지는 못하지만 근육을 사용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숨 쉬는 연습을 해본다. 양수를 들이마시고 소변을 보며 호흡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여자의 양수가 태아의 소변으로 채워지게 되던 그 무렵, 여자는 출산이 한 달 남짓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겁에 질리지 않는다.

이것 좀 보세요. 이 작은 눈이 깜빡이네요. 오므린 손가락 좀 보세요. 내가 낳았어요. 아빠. 내 속에서 이 아이가 산채로 태어났어.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행복한데 왜 날 몰라봐. 이런, 아이가 울어요. 아아, 예뻐라. 눈에 졸음이 가득하네요. 또 올게요.
저 또 왔어요. 아가는 지금 막 잠들었어요. 건강해 보이죠? 기운도 세고 튼튼해요. 젖을 얼마나 세게 빠는지 아파 죽겠어요. 날 닮아서 성질이 보통이 아니에요. 입술은 꼭 아버지 당신을 닮았어요. 누가 봐도 아빠 손자라고 할 거예요. 코도 너무 잘생겼죠? 제이슨이라고, 애 아빠가 코는 참 예뻤거든요. 아아. 머리숱 없는 것도 닮으면 안 되는데.

오늘은 작은 아버지 묘에 다녀왔어요. 살아계셔서 우리 아들 보셨으면 참 좋아 하셨을 텐데. 뭐라도 대답이라도 해봐요. 아니면 우리 아들 한번만 쳐다봐줘. 아빠 도대체 왜 그래. 아빠 이러면 나는 어떡해? 사람은 언젠가 다 죽잖아. 알면서 왜 이래. 아빠 젊음 한 평생 낭비한 걸로도 부족해서 여기서 죽을 거야?
지난번엔 내가 잘못했어요. 소리 지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간호사가 그랬거든요. 소리 지르고 그러면 안 된다고. 작은아버지 딸 알죠? 내가 데리고 살았던 애. 아빠 실종되고, 작은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데리고 살았어요. 지금은 병원 의사선생님이 됐어요. 우리 아들 낳을 때 그 애가 받아줬어요. 아빠가 당신 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 애 말이에요. 나대신 딸이라고 부른다는 그 애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 기다렸어요? 한동안 못 와서 죄송해요. 아래층 어떤 미친놈이 가스선을 잘라서. 이제 그만 울게요. 우리 애기 상처 볼 때마다 속상해 죽겠어요. 포대기로 잘 감쌌는데, 안 다치게 내가 잘 안았는데. 불길이 너무 뜨거워서 미처 신경을 못 썼나 봐요. 흉터 많이 남을까요? 나중에 어른이 되면 수술도 하고 그러면 되겠죠? 나 많이 이상해요? 나도 거울 볼 때마다 놀라요. 상처가 붕대에 들러붙어서 붕대를 새로 갈 때마다 죽었다 사는 것 같아요. 나 머리카락 하나도 없어요. 예전엔 이만큼, 허리까지 왔었는데. 제이슨보다 먼저 대머리가 될 줄은 몰랐어요. 하하. 웃을 일이 아니죠? 진통제 덕분에 많이 아프진 않아요. 이쪽... 눈은 흉하죠? 모자도 쓰고 머플러를 감아도 사람들이 괴물 보듯 쳐다봐요. 나 괴물 아닌데. 눈꺼풀이 다 녹았어요. 왼쪽 눈은 수술도 할 수 있다더라구요. 의안이라도 넣으면 덜 징그러울 거라고 하던데. 귀는 이래봬도 잘 들려요. 사실 눈,코,귀 성한 데가 없이 다 타고 녹았어요. 무슨 양초라도 된 기분이에요. 사람 피부가 이렇게 쉽게 녹나? 냄새는 못 맡아요 이제. 그래도 다행인건, 입은 멀쩡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아빠랑 얘기할 수 있잖아요. 자꾸 진물이 나요. 여름이라 그게 괴로워요. 모자 쓰고 땀나고 그러면 더욱 짓무르는 것 같아요. 아빠. 예쁘게 화장하고 찾아올 때도 못 알아 보셨는데. 이젠 영원히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왔네요. 한번만 쳐다봐 주셨으면 좋겠는데, 이 몰골을 보여드리기가 무서워서 이만 갈게요. 참, 뭐하나 물어봐도 되요? 엄마는 어떻게 날 두고 떠났을까요. 난 우리 애기 두고는 도저히 못가겠는데. 아빠는 뭔가 알고 계시나요?

여자는 칭칭 감은 흰 붕대 위로 챙이 넓은 감색의 모자를 눌러쓴다. 진밤색 머플러를 두르는 여자의 코는 살점이 떨어져 콧구멍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여자는 엄지손가락이 사라진 손으로 아이의 포대기를 잘 여며 가슴께로 들춰 업었다. 매듭을 짓는 여자의 손등이 비계가 눌어붙은 생삼겹처럼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었다. 울기 시작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병실을 나서는 여자의 뒤로 줄곧 허공을 응시하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빛바랜 얼굴위로 투명한 눈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리고 여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하얀 벽 위로 주홍빛 노을이 배어있다. 벌써 해질녘인가. 큰할아버지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으며 왜소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으셨다. 큰할아버지의 어깨가 애처롭게 들썩였다. 나는 잠시 의아했다. 큰할아버지가 정신이 나간건지, 정신이 나간 척을 하고 계신건지.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이 그토록 힘드셨던 큰할아버지가 유창한 말솜씨로 전개해 나간 이 이야기는 대체 무엇인가. 정신 나간 어르신의 상상 속 이야기라고 하기엔 마음 한구석이 묘한 불안으로 휩싸였다. 설마, 설마, 설마. 나는 오랫동안 앉아있어 얼얼해 진 엉덩이를 매만지며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쇳소리를 내며 흐느끼고 계셨다. 나는 조용히 문을 나섰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 일층 로비를 지나 정원으로 나오자 훅-하고 바람이 일었다. 나는 괜히 간지러워져 왼쪽 목을 어루만진다. 매끈매끈한 화상이 사선으로 주욱 그어져있다. 갑자기 코끝이 찌르르 하며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소름이 돋았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간질간질 하면서도 시신경이 긴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얼굴을 마구 찡그리며 울고 싶었다. 잠시 멈추어 서서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려 보았다. 울음이 나올 듯 말듯 하다. 흐으응. 흐으응. 콧바람을 풍기며 눈물을 짜내 보려 하지만 뻑뻑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허기를 느끼며 차키를 꺼냈다.

그날 밤 나는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하품을 하며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눕는다. 형광등 불빛이 사라지지 않고 망막에 남아 깜빡였다. 괜시리 불 꺼진 방안이 밝게 느껴진다. 눈을 감는다. 나는 꿈을 꾼다.

수심 32m, 동양에서 가장 큰 해송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우뚝 서있다. 그 장엄하고 넓은 품안으로 수십 마리의 고기떼가 벌거벗고 드나든다. 나는 발을 구르며 해송의 흰 가지 곁으로 다가간다. 고개를 들어 수면을 올려다본다. 색색의 연산호군락 위로 너울거리는 감태, 나는 하얀 바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내 호흡을 감상한다. 천천히 해송 주위를 돌며 헤엄치는 동안 거북복과 호박돔을 지나 문어를 발견한다. 어미문어를 위협해오는 자리돔떼. 어두운 바다 속에서 푸른빛의 은색을 띄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둥이를 모으는 자리돔떼에게 제 다리를 잘라 내미는 문어. 그 순간 해송 아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알주머니로부터 알들이 방출된다. 까만 밤바다에 눈송이처럼 퍼져나가는 새끼들. 어미문어는 힘차게 퍼져나가는 새끼들을 바라보며 저 멀리 의식을 잃어간다. 힘없는 그녀의 머리 위로 자리돔떼가 몰려온다. 사방을 에워싼 자리돔떼가 초연히 눈을 감고 누운 어미 문어의 온 몸을 쪼아댄다. 자리돔떼에게 쪼여 쓸쓸한 죽음을 당하는 문어. 문어. 문어. 화마의 주둥이에 얼굴을 쪼인 나의 어머니. 조금씩 멀어져가는 그녀를 돌아보지 못한 채. 나는 운다. 방출된 새끼 문어처럼 바닷물을 박차며.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