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정말 오래 있었는데 그만큼 일이 많았다. 원래는 인터라켄에 곧장 가려했는데 기차시간이 애매했다. 할 수 없이 인터라켄에 가기 전 잠깐 쉬어갈 곳으로 찾아간 곳이 바로 작은 산간 마을인 Brig였다. 이곳에서 일이 생겼다. 정말 큰 일이 생겼다. 워낙에 작은 산간 마을인지라 숙소가 많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모두 호텔뿐이었고 저렴한 호스텔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싼 호텔을 찾아가보았지만 스위스 프랑으로 82프랑. 우리 돈으로 9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돈을 아끼기 위해 기차역 대기실로 갔다. 인터라켄으로 가는 다음 기차를 잡기 위해서는 온종일 밤을 기차역 대기실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날 새벽. 기어코 일이 생겼다.

젊은 남자들 몇 명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면서 불쑥 기차역 대기실로 들어왔다. 갑자기 나와 함께 대기실에서 밤을 새던 캐나다 여성 여행자의 몸을 더듬고 돈을 빼앗더니, 나에게 다가와 칼을 들이대었다. 순식간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스위스에서 잠깐 방심하던 사이, 나는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빼앗겼다. 망연자실했지만 시간은 새벽, 그것도 일요일이었다.

   
강도를 만나 모든 짐을 빼앗겼던 스위스의 작은 산간마을 'Brig'

날이 밝자마자 서둘러 경찰에 신고하여 부랴부랴 조서를 작성하였고, 스위스 철도청에도 있는 힘을 다 짜내어 간절히 호소했다. 하지만 스위스 경찰은 오히려 불친절한 목소리로 짐을 다시 찾을 가능성은 1% 미만이지만, 혹시라도 찾게 되면 베른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보내주겠다고 선심 쓰듯 말해주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라커룸에 미리 넣어둔 카메라와 지갑뿐. 여권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쓸 때 경찰은 내가 빼앗긴 물건의 실제 가격을 일일이 물어 기록하였는데, 질문에 답변하는 그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전자사전과 명품 고어텍스, 명품 여행 가방과 등산화 가격만으로도 이미 100만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 외 각종 옷가지와 전자제품, 소소한 것들까지 합치고 나니 가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한국을 떠나올 때와 달리 엄청나게 길어진 여행일정 탓에 여행자 보험도 이미 오래전에 끝나버린 상황.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오시며 그런 큰돈을 단 한 번도 함부로 써보신 적 없는 아버지께 정말 죄송스러웠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7개월 만에 처음으로 화장실과 기차 안에서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고산병 때문에 죽을 뻔했던 티베트에서조차 여행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는데... 나는 그 때 처음으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여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여행을 계속하든,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여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서둘러 한국 대사관이 있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으로 가서 여권 재발급을 시도했다. 대사관측은 여권 재발급은 오직 국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대신 꼭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면 여행증명서라도 발급해주겠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여행증명서의 효력이 인증되는 국가가 서유럽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많지 않으니, 되도록이면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쓴 충고를 잊지 않았다.

영사님이 나에게 물어왔다. "앞으로 스위스를 떠나면 어느 나라를 가보고 싶습니까?" "동유럽과 중동을 거쳐 이스라엘을 가고 싶습니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스라엘까지는 꼭 가고 싶습니다." 여권이 없는 상태에서 스위스 이후의 여정이 무척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대사관을 찾아가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는 포기라는 단어 대신 다시금 여행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영사님의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여행증명서로도 여행이 가능합니다."

 사실 스위스에서 여행을 끝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두려웠다. 이대로 여행을 끝내버리면 평생 인생의 패배자로 남을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군대를 갓 전역했던 얼마 전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두렵고 아무 것도 잘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그 무기력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여행을 계속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겪으며, 물가가 엄청나게 비싼 스위스에서 일단 간단한 옷가지와 전자관련 제품을 사고 다시금 여행을 시작했다.

 다행히 인간은 고통을 가슴 속에 묻어두는 속도도 생각보다 빠르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던 일을 지금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나는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오바마 대통령의 열정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특히 그가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담대한 희망'이라는 단어를 매일 되뇌곤 한다. 희망이야 말로 인간이 고난과 장애 앞에 섰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고 맞서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이 아니던가. 내가 스위스에서 여권 없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아직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덕이다.

'여기까지 힘들게 여행해왔는데 어떻게든 버티어 낼 수 있겠지.' 현 상황의 고달픈 면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면을 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로 얻은 자그마한 기회나 가능성마저 나는 온 몸으로 붙잡았다. 또한 그 결과가 때로는 내가 원하던 그것과 너무도 동 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 스위스에서 일어난 일련의 비극은 나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준 고마운 스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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