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아비브로 가다보니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예루살렘 근교. 가파른 경사의 도로 오른쪽에는 그 유명한 사해가 펼쳐져 있고 사해를 경계로 건너편에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이 예루살렘을 마주하고 있다. 이타이가 제안을 하나 했다. "영지, 우리 잠깐 사해에서 수영하지 않을래? 사해의 물은 정말 끝내주거든. 여기 물은 염분이 높은데다 신비한 효력이 있어서 10분만 물에 몸을 담구어도 온 몸이 반들반들 해져 어때..?" "어...?..어. 알..알았어."

 말로만 듣던 사해. 그리고 사해를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종교 문화의 양대 성지인 예루살렘과 암만. 시간은 자정을 넘긴 새벽. 고속도로 위에는 오로지 우리 둘뿐이었고, 새벽을 밝히는 달빛만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이타이는 차를 돌리고서 사해 쪽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가더니 어디엔가 차를 세우고서 나를 재촉했다. " 영지, 이제 들어가자. 참! 그리고 안심해 사해 물은 정말 얕은데다 워낙 염도가 높아서 절대로 가라앉지 않아." 본래 물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동 한복판에서 깜깜한 새벽 아무도 없는 사해에서 수영을 한다는게 좀 당황스러웠다. 먼저 이타이가 물속에 들어가서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들어가 보았다.

 '헉, 몸이 자동으로 물에 뜬다.' 너무 신기했다. 아무리 힘을 주고서 몸을 물속에 담그려 해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수심도 정말 얕았다. 자동차 라이트에 반사된 물빛을 보니 보통의 바닷물과 다른 우유 빛이었다. 정말이지 감격이었다. TV로만 보던 사해에 몸을 담그게 되다니.

한참 환호성을 지르며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5분이나 지났을까? 피부가 맨들맨들 해졌다. 모두 사해의 짙은 염분농도 덕이었다. 저 멀리에는 사해 건너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고대 요새를 밝히는 횃불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 반대편에는 예루살렘이 보였다. 그리고 나와 이타이는 그 중심부인 사해에서 몸을 담근 채 느긋하게 분위기에 취했다. 계절이 여름이라 그런지 수온 또한 기가 막히게 적당했다.

   
이스라엘을 떠나기 전 버스정류장에서 이타이와 작별 사진을 찍었다.

어느 것 하나도 미리 예상하지도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9개월 전 갓 전역했을 무렵, 사회에 적응할 자신이 없어서 선택한 뉴질랜드 행. 그것이 어느새 길고 긴 여행이 되어 어느덧 나를 지구 반대편의 사해바다 한 가운데까지 인도한 것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신의 선물이 감격스러웠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두렵고도 떨렸다. 기쁘고도 감격스러웠다. 그 순간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었고, 그러자면 악마까지도 사랑하거나 혹은 새로운 신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쓰거나, 신에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여행 이후 얼마 동안 대단히 열심히 그 신에 대해 찾아보았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인류의 보물로 불리는 사해 바다 한 가운데 누워 눈부신 별을 바라보며 이타이와 애써 교감하고 기도하며 뜨겁게 눈물 흘리며 내가 찾으려 했던 자아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그것에 대한 것을 찾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보거나, 수없이 많은 인생의 선배들에게 결코 달갑지 않았을 문답을 청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의 천성은 손에 쥐고 보면 쉽게 으스러질 낙엽에 불과한 그런 대단찮은 진리를 발견해내는 일 같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탐구에는 도저히 적응이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미 나의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리고서 내가 했던 것이라고는 결국 다시금 여행을 꿈꾸는 것으로 머릿속을 단순화하는 것 뿐 이었다. 또 다른 여행을 갈망하는 동안 잦아들어져 있던 내 안의 참지 못할 나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다시 나의 내부에서 솟구쳐 왔고, 더 높은 이상과 목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겐 어떤 충족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무언가를 향한 동경으로 밤을 지새운다던가, 아니면 주위 친구들이 충족을 채우는 애인과의 연애를 통해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웠던 스승 이스라엘. 사해, 이타이, 예루살렘, 텔아비브... 모든 그리움을 뒤로 하고 결국 나는 돌아왔다. 정말이지 두려워했던 또 멀리하고 싶었던 나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아니 나는 시공간을 넘어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고향의 내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추억하는 일은 희열과 떨림이 뒤섞여 다가오곤 하는데, 그 감정은 내가 갈망했던 무언가를 향한 몸짓의 부산물인 동시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과 사람을 향한 나의 애처로운 그리움이었다. 나는 이 꿈에서 때로는 깊은 행복감을 느끼며 깨어나기도 했고, 때로는 지금 돌아온 이 자리가 왠지 어색하게만 느껴져 왠지 큰 실수를 계속 범하고 있는 것 같은 아련함과 반성에 떨며 온종일 침울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난 뒤 나는 서둘러 학부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전공과정으로 진학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직도 어디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를 확실히 정할 수가 없었다. 양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고 또렷해지기 시작했으니 나는 이제 완전한 성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며, 그나마 알고 있던 부분들을 향해 전력으로 도전할 용기조차 충만하지 않았었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내 내부의 소리, 그저 계속해서 나아가라는 비장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은 늘 버거운 일이었고 나는 날마다 그것에 반항했다. 이러다 내가 미치지 못해 미쳐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속에 끝없이 반성과 후회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렇게 2008년 2학기는 숱한 고민과 물음 속에서 의무적인 성실함으로 무장하여 미치도록 치열하게 시간과 싸워나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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