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스팸메일로 가득했던 메일함에서 자네 편지를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네. 뭔가 분주했지만 결국 방학이 방학(放學)이 아니라 방학(防學)이 되고 말았다는 엄살과 함께 이번 학기에 들을 만한 수업을 추천해 달라는 게 자네 편지의 골자였지.

자네가 생각하는 적절한 수업이란 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네마는 훗날 이 시절을 추억했을 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수업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하네. 대학 강의실 아니면 듣지 못할 수업이 바로 그런 과목일거야. 이른바 스펙을 넓히기 위한 과목은 굳이 지금, 여기가 아니어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종로쯤만 나가면 그런 강의는 지천으로 널려있지 않은가? 내가 자네 나이 때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하여 오늘날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과목이 <동양고전의 이해>였다네. 그땐 150여 명이 강의실을 메웠으나, 십오 년 여 명맥을 이어오다 3년 전 수강생 미달로 폐강이 되어 자네들은 만날 수 없는 과목이 되었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네. 자네들은 강좌 명에 ‘고전’이니 ‘~이해’가 들어가면 기피한다면서?

정(鄭)나라의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해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 크기를 본떴다네. 이것을 좀 유식하게 한자(漢字)로 말하면 탁(度)이라고 하지. 그런데 차치리는 장에 가면서 탁을 집에 두고 갔다지 뭐야. 신발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알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해. 먼 길을 되돌아 탁을 가지고 장에 다시 왔을 때는 이미 장도 파하고 난 뒤여서 차치리는 그저 안타까워만 하고 있었겠지. 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 사연을 알고는 한마디씩 거들지. “탁을 가지러 집에까지 갈 필요가 있었냐?”느니, “당신의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는가?” 하는 등등.

한낱 융통성 없는 먼 옛날 노인네 얘기로만 치부하지 말게나. 한비자 외저설좌(外儲說左)편에 나오는 이야기일세.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에 대한 일침을 가할 때 한번쯤 떠올릴 수 있는 말 아닐까 싶네. 자네나 나도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갈 사람들일게 분명하니 깊이 되새겨야할 걸세. ‘탁과 발(足)’의 관계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나, 주춧돌 없이 집을 지으려는 사람이나 기본 소양도 없이 학문을 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 모두가 내 눈에는 차치리를 자처하는 사람들로 보이네. 끊임없이 탁을 만들기 보다는 자신의 발이 될 수 있는 교양을 쌓는 게 진리가 아닐까싶네.

P군!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에게 고민을 토로할 때 자신이 이미 그 답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네. 자네는 어쩌면 선배들로부터 학점 잘 주는 과목의 ‘족보’를 입수하여 이미  수강신청을 했을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내가 에둘러 말하는 강좌의 그 강의실에 자네가 앉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네. 혹 첫 수업 시간에, 교수가 리포트를 많이 부과한다고 아마추어같이 강의실을 뛰쳐나오지는 말게. 리포트가 없는 강의, 자네들이 ‘와우’라면 교수는 ‘올레’라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 서로 알고 있잖은가! 사족하나 덧붙임세. 어떤 수업이든 첫날 첫 강의는 꼭 들어가도록 하게나.

자네에 귀에 속삭일 말을 확성기 대고 떠들어 정말 미안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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