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으뜸 명소는 말할 것도 없이 일감호(一鑑湖)라는 드넓은 호수이다. 그리고 일감호 동쪽 언덕에는 또 다른 명소로, 건국인의 영원한 스승이며 학교 설립자인 고(故) 상허(常虛) 유석창(劉錫昶) 박사의 묘소(墓所)가 있다. 일감호를 굽어보며 자리 잡고 있는 상허 선생의 묘소와 주변은 사계절 다른 옷을 갈아입으며 일감호 호반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유석창 박사는 조선조 말기 나라의 운명이 기우는 1900년에 태어나 1972년 73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되자 아버지 유승균 선생을 따라 중국 동북지역(만주)로 이주하여 청소년 시절을 아버지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에 몸담았다. 아버지 유승균 선생은 아호(雅號)를 “한 가지 근심, 곧 나라의 광복을 위한 근심만 있다.”는 뜻으로 ‘일우(一憂)’라 지어 부르며 항일의지를 다진 우국지사였다. 오늘 우리 건국대학교 사법고시 준비생들을 위한 생활관 이름을 ‘일우헌(一憂軒)’이라 하였으니 그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1920년대 상허 선생은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껴 귀국하는 아버지와 함께 국내로 돌아왔다. 그 후 상허 선생은 신학문을 닦기 위하여 경신중학교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나라 없는 현실에서 가난하고 병든 민중을 돕는 것이 광복을 위한 길이라는 신념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진학하였다. 1928년 의사가 된 후 상허 선생은 구료제민(救療濟民)의 뜻을 품고 1931년 <경성실비진료원>을 개원하여 조국이 광복되기 전까지 주로 의료사업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인술을 베풀었다. <경성실비진료원>은 후에 <민중병원>으로 확충되었고 오늘날 굴지의 대학병원인 <건국대학교 병원>으로 성장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선생은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도 교육입국(敎育立國)이 나라를 재건하고 부흥케 하는 길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대학을 설립하였다. 처음에 <조선정치학관>으로 시작하여 정치대학→건국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선생은 학교 설립자로, 건국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학교법인 이사장으로 봉직하며 초창기 건국대학교를 시작하고 발전시켜 반석에 올려놓은 어른이다.

유석창 박사는 1960년대에 이르러 이사장으로써 학교법인 운영을 통해 건국대학교 성장에 힘쓰는 한편 당시 후진적 농업국가의 면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농촌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건국대학교 농과대학, 축산대학(현재의 생명환경과학대학, 동물생명과학대학)을 적극 지원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가 되어 우리나라 농촌의 선진화를 위해 힘썼다.

이처럼, 항일민족운동으로, 구료제민사업으로, 교육입국으로, 그리고 농촌혁명운동으로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상허 선생은 1972년 1월 1일 새해 아침 홀연히 서거하여 1월 7일 사회장으로 엄수(嚴守), 고인이 혼신을 다해 터 닦은 건국인의 배움터 서울캠퍼스 일감호 동편 언덕에 잠들었다. 필자는 1972년 3월 문과대 사학과에 입학하였으니 아쉽게도 상허선생의 생전 모습을 뵙지 못했다. 상허 선생이 돌아가신지 어느덧 40년이 가까워진다. 이제는 상허 선생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을 만큼 무상(無常)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상허 유석창 박사는 그 건학 이념을 항상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건국인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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