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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 80년 역사를 추억하다
이호연 남기인 김용식 기자 | 승인 2011.05.12 16:14

우리 대학의 뿌리, 민중병원
1931년 5월 12일. 상허 유석창 박사가 세운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을 발판으로 민중병원의 역사는 시작된다. 당시 유 박사는 가난한 환자들의 구료사업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품고 기미독립운동 지도자 33인을 중심으로 실비진료원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 기성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구료원이 바로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이다. ‘사회영’ 이라는 명칭은 개인의 사리나 영리를 위해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하여 설립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1933년 3월에 유지회 이사 및 원장을 개선, 9월에는 진료원 이름을 사회영 중앙진료원으로 고쳤다. 1934년 3월에 다시 이사를 개선하여 이사장 설태희 외 14명이 선정됐다. 또한 5월에 진료원 이름을 다시 사회영 민중의원으로 변경했다.

일제 치하에서 민중을 위한 봉사적 구료사업을 지속해온 유 박사의 공적은 해방 후에 의료계는 물론 국가에서도 높이 찬양받았다. 이에 유 박사는 민중의원을 더욱 확장하고자 노력했고 1949년 5월에 사단법인체로서의 ‘사단법인 민중병원’으로 전환했다.

해방 전의 사회영 실비진료원이라는 이름은 이윤을 남기지 않고 실비만 받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해방 후, 가난한 민중들을 싼 치료비로 구료해준다는 취지에서 민중병원으로 개명했다.

그러다 민중병원은 1950년 6ㆍ25 전쟁으로 파괴됐고, 1958년도에 재건됐다. 재건 이후로 민중병원은 건강진단, 진료알선 등 다양한 의료사업을 지속했고, 환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1980년도에는 현대식 병원건물을 완공했고, 1981년 5월 학교 측에서 민중병원을 인수했다.

1985년 3월 12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시 조선민족의원’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1985년 9월에 이르러 144명의 직원을 거느린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2002년도에 새 병원 신축공사를 진행하여 2005년도에 건국대학교병원으로 개원했다.

사회영 중앙실비진료원으로 시작했던 민중병원은 수많은 민중들을 위한 구료원이었다. 우리대학 박물관의 채현석 관장은 “사회영 실비 진료원, 민중병원이라는 이름이 현재의 건대병원으로 바뀌면서 그 본연의 의미가 다소 약해졌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제 우리대학의 모태, 뿌리라 할 수 있는 민중병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조선정치학관의 개설
일제로부터의 해방이후 유 박사는 조국이 다시는 불행한 운명을 밟지 않기 위해서 선도적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교육 사업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에 유 박사는 1946년 2월 15일 조선정치학관 개설 신청을 경기도 지사에게 제출했고 5월 15일자로 조선정치학관은 개관됐다.

당시 유 박사는 한국민주당 창당 업무에서 여러 정치인들과 접촉하며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 있는 인재가 있어야 하겠다’고 깨달았다. 따라서 ‘정치학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은 정계의 젊은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이었다.

조선정치학관의 초대관장으로는 유 박사가 취임했다. 그러나 유박사는 곧 사임하고 6월 1일 옥선진씨가 2대 관장으로 취임했다. 조선정치학관은 정치, 경제, 법률등을 강의하는 학술 강습소였다.

정치대학은 당시 문이과 대학 6개 학과, 정치대학 4개 학과, 축산대학 2개 학과, 대학원(석사학위과정), 임시 2부 대학 등 4개 단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1959년 2월 26일자로 마침내 문교부장관의 건국대학교 설립 인가를 얻으면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10.28 건대항쟁, 그 뜨거운 함성
1986년 10월 28일 전국 29개 학교의 대학생들 2500여명이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위해 우리대학에 모였다. 원래 이는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 통일의 3대 구호를 내걸고 반나절 동안 하기로 예정된 집회였다. 하지만 발족 선언문을 낭독하고 화형식을 하던 중 들이닥친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압을 피해 학교 건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물과 난방이 끊긴 채 학교 안에 갇혀 농성을 하게 됐다. 30일까지 계속해서 진행되던 농성은 31일, 경찰 8000여명이 최루탄을 난사하며 학생들이 점거하고 있던 학교 건물을 강제로 진압하면서 끝나게 됐다.

건대항쟁은 4. 19 이후 벌어진 최대의 학생운동이었으며, 학교 건물 중 다섯 개가 폐허화 되는 등 23여억 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 또한 이 사건의 결과 학생들 1525명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들 중에는 우리학교의 학생들 304명이 포함돼 있었고, 연행된 학생들 가운데 1288명은 좌경용공분자라는 죄목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의 구속자를 낸 사건으로, 정부와 관제 언론들에 의해 ‘공산혁명분자의 난동’이라고 매도된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건대항쟁은 이후 87년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6월 항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우리 대학 제 2캠퍼스, 글로컬캠퍼스
1978년 우리 대학은 정부의 지방 분교 설립 권장 정책에 따라 본격적으로 분교 설립 계획을 추진했다. 그리고 1979년 9월 18일 문교부로부터 충주분교 설립인가를 받게 된다. 같은 해 12월 3일 토목공사 기공식이 열린 후 1980년 3월 5일 임시교사에서 충주분교 개교식을 가지게 된다. 1980년 9월 25일 토목공사가 완료된 뒤 9월 29일 충주분교에서 첫 수업이 시작됐다.

1980년 개교 당시에는 하나의 단과대 개념으로 ‘충주대학’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이후 학칙 개정에 의하여 ‘충주분교’라고 명칭을 바꾸게 된다. 그 뒤 충주대학과 충주분교를 번갈아가며 개칭하다가 결국 충주캠퍼스로 이름을 확정짓는다. 이는 서울캠퍼스와 동반하여 빠른 발전을 모색하고 지역의 특성을 살려 명문대학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노력에서 나온 결과였다. 충주캠퍼스는 처음 8개 학과 400명 정원으로 시작해 점점 그 과와 규모를 늘려갔다. 1985년 10월 30일에는 의예과 인가를 얻게 되어 1986년도부터 의예과에서 신입생 모집을 시작했다.

충주캠퍼스는 2005년 2월 의학전문대학원을 개원하고, 2009년 2월에 로스쿨을 유치하는 등 다양한 발전을 꾀하고 있다. 또한 2011년 5월 12일에는 명칭을 충주캠퍼스에서 ‘글로컬캠퍼스’라고 바꾸면서 새롭게 세계화와 지역화를 동시에 지향하는 스마트한 캠퍼스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다.

건국대학교의 발전, 각종 건물 준공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우리 대학이 여러 건물을 짓고 학교 규모를 확장시켜나간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건물 중에서도 중요 시설들이 많이 준공됐다.

1974년도에 착공했던 본관 건물 건설이 1976년 8월 15일에 완공됐다. 이 본관 건물은 1986년 10.28 건대항쟁 때 학생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979년 5월 15일에는 학생회관이 일감호 근처에 신축되면서 학생 활동과 관련한 기구들이 새 학생회관으로 이전하게 된다.

1985년 11월 23일에는 상허기념박물관이 준공됐다. 이는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학관이 문을 열었던 종로구 낙원동의 붉은 벽돌집이, 낙원동 교사 정비 계획에 따라 서울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원형대로 복원하여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은 구한말 서북학회 건물로 개화기의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는데, 벽돌을 제외한 기초 부분과 계단 부분, 그리고 중간 부분에 끼워진 석재들은 전부 옛날 건물에서 그대로 옮겨와 복원됐다. 건물의 구조와 크기 역시 옛날 건물과 동일하게 복원됐다.

1989년 3월 4일에는 상허기념도서관이 준공됐다. 상허기념도서관을 짓는 데는 동문들과 그 당시 우리 학교에 재직 중이던 교직원들의 힘도 컸다. 1987년 3월 착공하여 1년 만에 준공식을 가지게 된 상허기념도서관은 당시 대학도서관으로는 동양최대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우리대학에 다양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2000년에는 건국대학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새천년관이 세워졌다. 2004년에는 제2학생회관이, 2005년에는 건국대학교 병원이 준공됐다. 2006년에는 대학 최초의 민자 기숙사인 쿨하우스가 생겨 더 많은 학우들에게 좋은 시설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수익사업으로 대학발전 도모
우리대학은 수익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 대학으로 유명하다. 건국유업과 건국햄은 물론 최근에 지어진 스타시티 역시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건국유업은 1964년 우리대학 축산대학의 부설 우유처리장으로 시작했다. 1년 후인 1965년 ‘건국우유’라는 이름으로 시판에 들어갔다. 건국우유는 그 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1991년에는 제 2공장 생산라인을 자동화 했으며 초코우유, 요구르트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92년에는 저온살균우유 ‘닥터유밀크’를 2004년에는 비타민 우유를 개발했다. 1999년에는 음성에 신공장을 신축했으며 레스티오, 우즈무즈 등 카페를 개업해 우리학교 학우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건국햄은 1978년 건국골덴 프레스햄과 골덴 소시지를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축산대가 강점인 우리대학의 이점을 살려 백화점 등에 입점하고 있다.

또 하나 특징적인 우리대학의 수익사업을 살펴보자면 바로 부동산 사업이 있다. 캠퍼스를 화양동으로 이전하기 전, 낙원동에 있던 빌딩은 임대수입으로 큰 이익을 봤다. 또한 최근에 세워진 스타시티는 노인을 위한 ‘더 클래식 500’과 쇼핑몰,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까지 갖춘 주상복합타워형 아파트이다. 기존에 야구장을 이천으로 이전하면서 건대입구역 주변 블록 전체가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을 갖추게 됐으며 엄청난 유동인구를 끌어 모으고 있다.

이런 수익사업의 발전은 우리대학에 대한 지원으로 이어졌으며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운 대학을 신설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우리대학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의정부 캠퍼스로 연구중심 글로벌 대학으로
2009년 11월 ‘건국대학교 KU Tech 의정부 클러스터’를 조성하기 위한 의정부와 우리대학 간에 MOU를 체결했다. 의정부 클러스터는 2015년에 반환예정인 의정부시 고산동에 위치한 캠프 스탠리에 22만 4천평 규모로 지어질 예정이다.

의정부 클러스터는 서울 본교의 부지 개발이 거의 완료돼 포화 상태에 이른 현 시점에서 ‘드림건국 2011’ 계획이 끝나면 준비하게 될 ‘2020년 플랜’을 위해 학교의 새로운 성장 동력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이뤄졌다.

우리대학은 의정부 클러스터에 대해 두가지 안을 내놓았다. 1안은 운영 중인 77개 연구소를 한군데로 모으고 그 외에 국내외 기업연구소를 신규 유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연구중심의 기능을 수행하는 연구중심의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것이다. 2안은 외국어만으로 캠퍼스 생활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기숙사 등 모든 생활편의시설을 갖춘 친환경 ‘글로벌 캠퍼스’를 조성하는 방안이다.

캠프 스탠리는 서울 캠퍼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서울~포천간 민자고속도로의 산곡IC가 2015년 완공됨은 물론 장암~자금~양주회천 구간의 국도대체우회도로가 개설 중에 있어 앞으로의 전망은 더욱 밝아보인다.

현재 우리대학은 의정부 캠퍼스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구상 중이며 부지 매입 전에 구체적으로 대학이전 관련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호연 남기인 김용식 기자  kkpress@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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