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한 토막. “한 그릇 밥과 국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을 지경이더라도, 쯧쯧 혀를 차면서 꾸짖으면서 주면 길 가는 보통 사람은 받지 않으며, 발로 차면서 주면 걸인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자』 상)

유학의 특징을 나타내는 가장 애용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나를 위한 공부”라는 의미이다. 아마 중ㆍ고등학교시절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공부해서 남 주느냐?”라는 말은 이 유학적 마인드에서 온 것이다. 동양 사상이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특히나 유학은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기도 하지만,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의해 피동적으로 규정된 ‘나’는, 부모에게 자식이며, 선생에게 학생이고, 사장에게 직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존재하는 ‘나’는 능동적이다. 이런 ‘나’는 축구를, 프로그래밍을, 또는 노래를 하는 한에서 ‘나’이다. 말하자면 나는 개성 또는 독창성을 발휘함으로써 ‘나’인 것이다. ‘성선설’로 유명한 맹자는 이 능동적 ‘나’를 인간의 보편적 본질로 확장시켜 생각했다. 내가 ‘나’인 까닭은 ‘내가 X를 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사람이 X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X’는 그 유명한 ‘사단(四端)’이다. 즉 사람은 측은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며, 사양하고 양보하며, 옳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다.

‘밥그릇’ 이야기에서 맹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배고파 죽을 지경에 처하더라도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밥과 국을 먹지 않는다. 비록 무일푼의 거지라 할지라도 자존심을 구기는 밥 먹는 일을 달가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하는 “자존심 빼면 시체”라는 말이 이것이다. 맹자는 인간이 자존심을 잃어버리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요사이 대학과 관련된 언론 지면은 온통 등록금, 청년 실업, 일자리, 스펙과 같은 용어로 뒤덮여 있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운운하며 사회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다. 그럼에도 한가롭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나와 별 관계없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에 앞서, 아니 비판을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자존심을 먼저 세워야하지 않을까? ‘남을 위한’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대학생, 또 그것을 강요하는 대학과 사회, 죽은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요즘 유행하는 책제목처럼 “분노하라.” 하지만 분노는 나로부터 나를 위할 때에만 진정성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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