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우리의 일상을 반영한다. 얼마나 우리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공감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이는 시청률로 이어진다. 표제에 달았던 무한도전과 남자의 자격은 두 공영방송사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의 황금시간대를 점하고 있는 대표성 있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 두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차이가 난다. 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 로부터 기인한다.

대한민국은 역사 속의 조선이 가졌던 동방예의지국의 지위를 잃은지 오래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유교적 위계질서보다는 평등 중시 사회로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평등 지향성은 무한도전에서 잘 드러난다. 가장 연장자인 박명수에 대한 하하(하동훈)와 노홍철의 깐죽거림 혹은 빈정댐은 그들의 캐릭터를 넘어 사회 변화를 여실히 드러내기에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재석이 표출하는 ‘공감’은 연령의 고저를 뛰어 넘는다.

남자의 자격은 어떤가. 이 프로그램은 ‘남자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과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제대로 된 사회 변화의 양상을 잡아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이경규가 중심이 되어 위계적으로 행동하고 그에 대한 다른 이들의 비판은 ‘하극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경규가 나타내는 위계적 카리스마는, 사회 곳곳에 남아 있는 계층구조에 대한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

‘무한도전’과 ‘남자의 자격’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드러내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젊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더 이상 권위와 나이, 그리고 자신들에게 수동적으로 지워진 위계질서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노력까지 실천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리더십(leadership)’에 매몰되는 개성보다, ‘팔로워십(followership)’에서 드러나는 자신감과 창의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를 따르라’는 나폴레옹의 말보다 ‘모든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던 프랑스 68혁명의 연대의식에 우리는 더 많은 공감을 느낀다.

박원순과 안철수, 박경철 그리고 문재인까지. 리더로서의 자격보다는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되는 동료의식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전면에 드러나고 있다. ‘무한도전’이 5년의 시간을 넘어 함께 눈물짓고 서로 격려하며 끈끈하디 끈끈한 연대의식을 쌓고 있을 때, ‘남자의 자격’은 콘텐츠의 변화만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다양성만을 제공하고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를 판단하는 혜안은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TV프로그램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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