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기본은 이야기지만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소설이란 이야기를 질서화 시켜 허구적 상상력을 첨가하여 작가의 의도대로 세계를 형상화 시킨다. 작가가 만든 세계는 현실을 많이 닮아 있지만 작중 의도에 따라 세상의 법칙들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다. 작가 김중혁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능청맞다. 그의 소설에는 평범한 모습으로 위장한 비범한 소재들이 가득하다. 그의 데뷔작인 중편 소설 ‘펭귄 뉴스’를 보면 근 미래를 배경으로 따분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다가 예기치 못하게 비트 해방군에 말려드는 남자가 나온다.

주인공인 ‘나’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채우는 전쟁속보가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쟁속보보다 강렬한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을 남자는 ‘비트’라고 여긴다. 모든 것을 따분해 하는 주인공은 우연히 라디오 DJ 여자의 목소리에서 비범한 비트를 느끼게 된다. 비트에게 끌린 그는 여자 DJ와 접촉하게 되고 ‘비트를 거부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운동’에 말려들게 된다. 사실 주인공이 느끼는 따분함의 원인은 텔레비전이 아니다. 방송 프로그램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습관 때문이다. 이런 습관들, 즉 사회적 관습들이 따분하고 멍청한 일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의미 없는 관습들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나’가 느낀 비트는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몸부림이다. 하지만 비트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강렬함이 없는 비트는 의미를 잃는다. 문제는 내가 관습을 거부하든 그렇지 않든 사회는 잘 돌아가기에 대부분은 다시 무의미한 따분함을 선택한다. 동시에 우리와 실체 사이에서 매체 역할을 하는 관습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전달하지 않는다.

김중혁의 소설은 결국 실체에 맞닿아 있다. ‘무용지물 박물관’에서는 시각장애인용 라디오를 디자인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레스몰이라는 회사가 등장한다. 무엇이든지 압축하여 더 작고, 적게 만드는 것이 목표인 디자이너는 원본의 실체가 아닌 자신이 만든 허상에만 매어있는 인물이다. ‘회색 괴물’에서는 타자기 수집가인 주인공이 오타를 줄이는데 젊을 바친 최고의 타자수를 만나게 되고 원본을 무한히 재현하는 타이핑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아이러니함을 느끼게 된다. 김중혁의 소설은 행위의 목적을 잃은 현대인들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행동을 하고 있지만 정작 행동 자체에 집중하면서 본래의 목적을 잊게 된다. 만약 자신의 삶이 쳇바퀴 돌듯 의미 없이 반복 된다면 김중혁의 소설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안정적이지만 따분한 관습 속에 갇혀 있는 소설 속 주인공과 당신과 많이 닮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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