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한 사회의 미래가 숨 쉬는 터다. 옹근 22년의 언론인 생활을 마치고 2011년 건국대에 처음 몸을 담았을 때다. 자유의 싱그러운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었다. 강의 틈틈이 건대 동산을 산책했다. 드넓은 평지에 큰 호수까지 갖춘 건대 동산은 논설위원 시절에 이따금 특강을 왔을 때 상상했던 풍경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눈길이 머문 곳은 황소 상이다. 본관 앞 잔디밭에 가만히 자리한 황소 상을 처 음 발견했을 때 나는 오랫동안 떠나지 못했다. 대학의 상징을 독수리나 호랑이로 내세운 대학들이 떠올라서만은 아니다. 정작 ‘건희와 건우’들이 황소에 애정이 없어 보여서다.

과민한 판단인지 모르겠으나 그 뒤에도 황소가 건대의 상징임을 자랑스레 말하는 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건대 공식사이트에도 ‘학교 상징’으로 황소는 밀려있다. 접속에 접속을 거듭할 때 만날 수 있다. 황소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풀이해 놓았다. “건국대학교의 상징인 황소(OX가 닌 Bull)를 엠블렘 하단 좌우에 배치하여 조형적 조화를 꾀함은 물론 KU건국인의 힘차고도 경쾌한 전진을 상징적으로.” 전문이다. “OX가 아닌 Bull”이란 설명에선 공연한 사족을 넘어 ‘자격지심마저 읽힌다.

 언젠가 시사칼럼을 쓸 때도 인용했지만 시인 박목월은 황소를 예찬했다. “어진 눈에 하늘이 담겨지고/ 엄숙한 뿔이 의지를 상징하는/ 슬기롭고 부지런한 황소”를 찬하는 시인의 마음은 본관 앞에 서있는 상에서 뚝뚝 묻어난다. 얼마나 많은 건우와 건희가 그 시를 음미했을까.

찬찬히 톺아볼 일이다. 독수리나 호랑이 따위와 견주어 황소는 얼마나 성숙한 상징인가. 나는 황소에서 시대정신을 읽는다. 비상하는 독수리나 포효하는 호랑이는 권세를 상징한다. 과연 그것이 대학의, 젊은 지성인들의 ‘기호’일 수 있는가?

아니다. 하늘을 담은 어진 눈이야말로 지성인이 지녀야 할 눈매 아니던가. 시인은 황소의 ‘엄숙한 뿔’을 곰비임비 예찬한다. “산을 옮길 힘을 가졌으나 / 어린아기 처럼 유순하고 어떤 어려움도 / 성실 근면으로 이겨내는 / 그의 인내가 불의 앞에서는 / 불꽃으로 활활타는 황소.”

그렇다. 황소의 엄숙한 뿔은 불의 앞에 불꽃으로 타오른다. 자기보다 약한 생명에게 결코 뿔을 들이받지 않는다. 불가에서도 소는 거룩하다. 십우도에서 나타나듯이 소는 깨달음을 뜻한다.

 기실 잊어가고 있는 것은 ‘황소’만이 아니다. 1931년 건국대의 출발점이 된 ‘민중병원’에 담긴 뜻도 다시 새겨볼 만하다. 왜 설립자는 병원을 세우면서 굳이 ‘민중’이라는 말을 골랐을까. 그 뜻은 해방 공간에서 대학을 세우며 ‘건국’이라는 말을 선택한 뜻과 이어지지 않을까. 건국동산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황소 상을, 아니 수많은 ‘황소’들을 다시 예찬하는 까닭이다. 그 어진 눈, 엄숙한 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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