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수외혜중’의 상황을 그려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이중주라고 한다. 즉 내용을 담는 그릇이 형식이요, 그 그릇으로서 형식에 의미가 담겨지는 게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의미 있는 형식을 갖출 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사를 살펴보면 형식과 내용의 관계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디자인 분야에서는 ‘형식은 기능을 따른다’는 형식주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작품의 형식은 내용에 종속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바로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럴 경우, 조형의 결과로서 디자인 작품은 기능을 최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같은 형식주의는 곧 기능주의와 연결되어 장식이 없는 순수한 미적 형식만을 고집하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는 ‘예술은 예술 이외의 일체의 것과 무관하다!’는 관점 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으로서 예술지상주의를 표명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순수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이때의 예술은 예술의 미적 자율성을 획득했을지는 모르나 대중과 멀어지는 예술의 고립화를 자초하기도 했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의 조화가 아름다움의 특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술의 지상주의도 그리고 예술의 순수주의도 예술의 한쪽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술은 예술활동(창작활동과 감상활동)과 그 성과로서의 작품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다. 특히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의 이중주에 의한 조화율을 이뤄야 하듯이, 예술활동 또한 창작활동과 감상활동이 서로 어우러지는 앙상블이어야 한다. 창작 없는 예술은 공허하고, 감상 없는 예술은 맹목적일 수 있다. 아침저녁으로 상큼한 날씨의 초가을! 발품 팔아 작품 하나와 만나며 예술활동을 즐길 줄 안다면, 여러분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세계를 협연하는 연주자로서의 어엿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