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 건대항쟁, 그 아픔의 역사

지난 10월 27일 늦은 4시,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학우들에게 ‘테크노 동상’이라고 불리는 10.28 건대항쟁 기림비 앞에는 당시 건대항쟁을 직접 경험했거나 그를 지켜본 십여명의 사람들이 그날을 기리기 위해 모였다. 10.28 건대항쟁은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 통일의 3대 구호를 내걸고,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우리대학에서 전개된 학생 운동이다. 이 사건은 이듬해인 1987년 6.10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우리대학 학우들 역시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이날 기림식에 참석한 학우는 <건대신문> 기자를 포함해 10명이 채 안됐다. 그렇다면 건대항쟁은 무엇이며,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을까? <건대신문>에서 올해로 26주년을 맞는 10.28 건대항쟁에 대해 알아봤다.

"사랑하는 건국학우여, 우리는 그대의 민주를 위해 투쟁한다"

▲ 건대항쟁 당시 옥상에 모인 학생들의 모습 ⓒ 청년건대

1일째(10월 28일)

▲ ⓒ 구글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애학투련)이 우리대학 황소상 앞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평소와 다르게 많은 경찰들이 학교를 에워싸고 있었다.
평화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던 중에 경찰들이 갑자기 교내로 들어와 학생들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학생들은 흩어져 각각 사회과학관(현재 경영대), 본관, 이과대학, 도서관,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갔다. 계획된 농성이 아니었기에 학생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학생들은 일단 지도부를 구성하고 조직을 꾸려 각자의 역할을 정했다. 대부분 농성이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계획적’ 점거농성으로 보도했고 용공분자, 불순세력으로 그들을 매도했다.

2일째(10월 29일)
▲ 옆 건물로 음식을 나누는 모습 ⓒ 청년건대
병력이 증강됐다는 정보와 함께 테러진압전문 부대가 경찰 요청에 응했다는 정보가 기자를 통해 입수됐다. 학생들은 연행학우 석방, 경찰의 교내철수, 안전귀가가 보장 되지 않는 한 농성을 해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내부 단결을 위해 타이프와 복사기가 설치된‘열린 공간’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외부에 선전을 하고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누구나 대자보와 전단으로 신속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4시경엔 건물 내 단수가 되고, 오후 7시 경에는 소방차가 교내에 진입했다. 취침은 교대로 이뤄졌고 추위를 막기 위해 헌 책이나 못 쓰는 서류로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보호했다. 경찰들이 밀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창문이 깨져 학생들은 더욱 추위에 떨어야 했다. 모든 건물에서 식량이 부족했지만 옥상끼리 연결해 식량을 나눴다. 건대항쟁 지휘책임자였던 정현곤 선생은 “둘째날은 한 사람당 빵 한조각 정도 먹을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경찰이 방해해 저녁에는 완전히 탈진상대가 됐다”고 말했다.

▲ 옥상을 지키는 학생들    ⓒ 청년건대
3일째(10월 30일)
셋째 날, 경찰은 헬리콥터에서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다. ‘자진 해산과 투항’을 유도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건물에서 투항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만 직접 연락을 취한 결과 ‘그런 사실이 없다’는 답변이 왔다. 경찰이 분열을 유도하는 작전을 쓴 것이다. 소총을 든 군대의 2개 중대가 교내로 배치됐다는 정보에 진압이 가까워짐을 알고 긴장 속에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은 개의치 않으나 힘 다하지 않고 꺾이는 걸 거부한다” 사회과학관 강의실에 써 있던 벽서 중 하나다. 이처럼 학생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 무리지어 토론을 하고 건물 내벽에 자신의 입장을 쓰기도 했다.

 

 


4일째(10월 31일)

▲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학생들                                                 ⓒ 청년건대

▲ 경찰이 학교에 물대포를 쏘고 있다.                                           ⓒ 청년건대

경찰의 경고와 협상 제의가 들어왔고, 9시 까지 협상 여부를 통보 바란다고 전해왔다. 하지만 9시가 채 되기 전에 경찰의 진압이 시작됐다. 학생들은 옥상으로 올라갔으나 헬기의 바람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기에서 최루탄을 직격으로 투하했다. 이는 벽을 뚫고 들어와 불이 날 정도였고 몸에 불이 붙은 학생도 있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학생들은 옥상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정현곤 선생은 “최루탄이 터지고 곳곳에 불이 붙고 정말 난리가 아니었다”고 건대항쟁 당시 치열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학생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사상자를 낼 수 없다는 판단에 공격을 중단하라는 백기를 들었지만 공격은 계속됐다. 며칠간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목마름에 고통당한 학생들은 거의 실신하거나 화상을 입고 쓰러졌다. 경찰의 이러한 무력진압은 한 시간여 만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끝났다. 4일간 고립돼 농성을 한 학생들은 전원 연행됐다.
이 날 천 252명이 연행되고 이 중 천 288명이 용공좌경 분자라는 죄목으로 구속됐다. 이는 헌법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최다 인원을 구속한 것이다. 사건 진압과정에서는 53명이 화상과 타박상을 입고 입원했으며 우리대학의 재산피해도 23억 5천 여만원에 달했다. 건대항쟁 기간 동안 동원된 경찰 병력은 총 126개 중대 만 8천 900여 명 이었다.

저는 건국대학교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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