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너의 책임이니 네가 사라지면 문제는 해결 될 것’이라는 증오의 망령이 우리사회를 떠돌고 있다. 지난해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물론, 총선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좌파’로 불리는 민주통합당이 정권을 장악한다면 “북한에 나라가 넘어간다”는 공포가, ‘우파’로 불리는 새누리당이 정권을 잡는다면 “유신정치가 돌아온다”라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곧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로 발전했고, 한 정치인의 8년 전 발언을 꼬투리 삼는 네거티브는 물론 TV토론에 나온 대통령후보자에게 무식하단 비난을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비단 정치에서만 나타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사회는 자연스럽게 ‘누구의 잘못인가’라고 서로 책임을 묻는다. ‘용의자’들은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이 아니라고 알리바이를 제시하고 다른 이를 지목한다. 한편, 용의선상에 없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에게 거센 비난과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고 물리적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 또 자신에게 책임의 화살이 꽃일까 어떻게든 책임소재를 찾고 터무니없는 근거로 책임이 의심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의심에 반감을 표하는 다른 이들도 무시한다. 결국, 책임만 물어 생산적 논의 자체가 불가능해지기에 이른다.

동일 집단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이 상대 진영에 대한 동일 진영의 무차별적 의심과 비난에 경계를 표한다면 ‘이 사람이 오늘 왜이래?’라며 의문을 표하거나 혹은 ‘개량주의자’로 비난한다. 이는 과거 주체사상파로 불렸던 사람들과 ‘일베저장소’로 대표되는 넷우익들도 똑같다. 두 집단 모두 본인의 진영논리에 대한 자체 반박이 올라오는 순간 ‘사상적 양식이 부족하다’ 혹은 ‘네, 다음 선비’와 같은 답변으로 상대방의 입을 막고 자신의 귀를 막는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분법에 너무 익숙해 있다”며 “정치의 주요 콘텐츠가 책임을 묻는 증오와 공포라는 진영논리에 휩싸이다 보니 저쪽이 일리가 있는 주장을 해도 배격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또 “이런 상황에서 어떤 건설적인 토론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이미 사람들은 주변에 책임을 물을 준비가 돼있고 각자의 진영논리에 충실한 틀에 갇혀있다. 대한민국의 절반이 한때 안철수가 가지고 나온 ‘증오의 정치를 타파하겠다’란 신선한 카피에 열광했다. 그러나 안철수에 열광했던 만큼 그가 내세운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진영논리를 넘어 생산적 담론을 형성할 바탕을 만들 수 있는 증오의 종결자가 필요한 시대다. 숨막히는 뒤태 종결자가 아닌 ‘증오의 종결자’ 말이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