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이 돌아왔다. 전각을 다시 세우고, 색을 입히고 그 위로 기와를 구워 얹어 무사히 복원한 것이다. 새 단장한 숭례문의 양식은 이전과 달리 조선 초기 식으로 고증되었다. 색도 곳곳이 바래고 때 탔던 기존에 비해 멀끔하다. 이만하면 ‘새 건축’이라 불릴 만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전각 곳곳에서 소실될 당시의 상처를 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숭례문에 흉터가 남았다. 아니,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중심기둥인 ‘고주’다. 소실 당시 불에 그을린 옛 나무를 재활용했다. 완전히 불탄 부분만 잘랐고 그 자리에 새 나무를 덧대어 붙였다. 한 기둥에 옛 나무와 새 나무가 공존하는 모양새다. 흉해 보이지만 색을 칠하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외려 불에 그을린 모습이 잘 보이도록 드러냈다. 바로 ‘경각심’을 갖자는 취지에서다. 일종의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인 것이다.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주요 공직 후보자들의 역사관이 논란이 되었다. 역사의 ‘흉터’를 지우거나 호도하는 모습을 보인 탓이다. 조윤선 여성부 장관 후보자는 유신헌법을 현대 헌법의 초석이라 평가했다. 국가교육의 수장인 서남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5.16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묻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라 개인적 견해를 밝히는 게 적절치 않다는 말을 남겼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존재하듯 역사에 ‘공’이 있으면 ‘과’도 공존한다. 박정희 정권도 예외일 수 없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산업화는 분명한 ‘공’이다. 반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 독재 행위는 명실상부한 ‘과’다. 공과의 명확한 판단은 올바른 발전의 전제다. 새 단장한 숭례문에는 이전과 달리 최첨단 방재 시설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부주의로 인한 화재라는 ‘과’를 기억했기에 교훈을 얻었고 발전한 것이다.

우리사회는 독재의 재발을 막기 위해, 나아가 ‘87년 체제’ 극복을 위해 무엇을 설치했는가? 고위 공직자 후보들부터 과거사의 진실을 외면한다. 독재의 흉터를 오롯이 남기지도, 기억하지도 않은 사회다. 반문해볼 때다. ‘그을린 기둥’을 숨기는 이들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킬 자질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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