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대한 오해들

 광주에 북한군이 대대규모로 잠입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의 대표로 있는 임천용 씨의 주장이다. 그러나 임 씨의 주장은 지난 2006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부터 올해 TV조선 인터뷰까지 엇갈리는 부분이 상당해 신뢰성의 문제가 있다.

임씨는 2006년 인터뷰에서 서해안을 통해 북한군 450명이 침투했고 이 중 150여명이 귀환했다고 주장했다. 또 이중 절반은 계엄군, 절반은 시민군에 침투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2013년 인터뷰에서는 땅굴로 월남, 육로를 통한 6백여명의 북한군 광주 잠입을 주장하고 있다. 임 씨가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주장한 북한군의 침투경로와 귀환 경로, 투입인원은 매번 달랐다.

이 때문에 임씨의 발언은 신뢰성이 매우 떨어진다. 게다가 당시 대한민국은 계엄정국 하, 모든 항만과 해안지역에서 감시가 일어나고 있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더군다나 신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삼아 정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도리어 북한군 개입설은 신군부의 국방 무능을 증명하는 꼴이다. 또 임씨의 주장에 의하면 약 2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들의 시신은 찾을 수도 없고 이만한 전공을 올렸다면 계엄군에 대한 신상필벌이 있어야 할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북한 고위 관료 출신 황장엽씨도 “지금까지 그래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며 “제일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김일성이 그것을 듣지 않았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광주항쟁을 취재했던 조갑제 기자는 이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에 길을 열어줘야 가능했을 법한 이야기”라고 비판했다.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하고 짧은 시간안에 무기고를 장악했다

아무런 군사적 지식이 없는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하고 교도소를 습격하고 36시간안에 군 무기고를 장악했다는 것은 결국 군사적 지식이 풍부한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미 반론이 나온 상황이다.

지난 1995년 검찰은 5.18 수사결과 발표에서 무기고 장악에 대해 밝혔다. 시위대가 광주세무서를 방화, 점거할 때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했다고 밝혔다. 또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 후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해 화순, 나주 등 지방의 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다고 밝혔다. 결국 파출소, 근처 방위산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한 것이다.

한편 장갑차에 대한 이야기는 군용 차량을 만드는 아시아자동차 근무자들이 협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폭도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

이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다. 5.18기념재단은 시민군들이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또 5.18 기념재단은 “오히려 3공수부대가 교도소 인근 주택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며 “경운기를 타고 귀가하던 주민 4명 중 2명은 계엄군의 총에 숨졌고 2명은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지난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교도소는 당시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던 주둔지이자 경계선이었고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시민군을 막는 과정에서 생겨난 유언비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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