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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활동은 엠티가 아니야!
김혜민 기자 | 승인 2013.06.10 23:24

유엔식품안전기구에서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으로 △식량안보 △환경보전 △사회문화적 기능 △식품안정성 기능 △경제 기능의 다섯 가지로 세분화해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중요한 농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농업과 농민들이 정책은 물론 국민들의 인식에 있어서 홀대받아 온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환경에서 현재 우리 농민들이 몸소 느낄 수 있는 문제들은 불합리한 농수산물 유통구조, 값싼 수입 농산품의 유입, 농가 부채 증가 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농민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체험하고 또 공감하기 위해 전부터 대학생들은 ‘농활’을 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농활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농촌으로 가는 엠티 정도가 돼 버렸다. 대학생 농활의 역사와 참된 의미 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농활의 역사

농촌활동(농활)은 1920년대 농촌계몽운동, 1930년대의 브나로드운동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28년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의 연합전선인 신간회는 일제와 지주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일어났던 갑산화전민 투쟁에 청년 학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30년대의 농활은 브나로드 운동과 전후의 계몽운동은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인도주의를 깔고 '사회봉사'의 한계를 갖고 진행됐다. 때문에 30년대의 농활은 오히려 농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은폐하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후 농활은 1940∼1950년대의 단절기를 거쳐 1960년대 초 향토개척단 운동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농촌활동은 ‘농촌봉사활동’으로 불려 졌으며 역시 계몽・봉사적 성격이 강했다. 농활은 유신체제 시기부터 농촌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때부터 용어도 ‘농촌봉사활동’에서 ‘봉사’라는 말이 빠져 ‘농촌활동’으로 바뀌었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3년엔 대학생 농촌활동을 농민의식화 활동이라는 이유로 규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가 실시되면서 농촌활동 참가자는 급증했고, 특히 정부가 농촌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 1988년부터는 한 해에 수만명의 대학생이 농촌활동에 참가하였다. 1987년 이후 농활은 민주화의 영향을 받아 광범한 조직 기반을 갖게 된다. 6월 항쟁 이후 농민들의 ‘전국농민단체연합(전농)’과 대학생들의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이라는 전국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두 단체는 대학생 농촌활동을 농민운동과 학생운동의 연대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고, 전농과 전대협의 연계 덕분에 농촌활동의 참가인원이나 대상마을이 크게 늘어났다. 전농의 등장이 말해주듯이 농민운동은 1980년대 후반에 한국 사회의 주요한 사회운동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과거와 같이 대학생들이 농민들을 의식화시켜 농민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의식화 전략은 농민들로부터도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활동은 농촌 일손 돕기와 학생들의 사회체험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변화됐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학생과 농민들 간의 참된 이해 증진을 목표로 삼는 ‘대중농촌활동’, ‘생활농촌활동’이라는 모토를 내걸게 되었다. 학생들은 농활을 농사일을 직접 체험하고, 땀의 소중함을 농민들에게서 배우는 기회로 생각하게 되었다.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주도한 여름 농촌활동에는 전국 142개 대학에서 사상최대 규모인 6만여 명 학생이 참가하기도 했다. 

김혜민 기자  kimhm333@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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