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비유가 많이 되는 단어가 또 있을까? 만약 전 세계의 시와 글귀들을 모두 모은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는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를 은유해주는 대상들일 수도 있다.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가 불티나게 팔릴 만큼 사랑은 한국사회에서 항상 중요한 키워드이다. SNS를 떠도는 우스개 소리로 이런 것도 있지 않은가? 미국, 일본, 한국의 수사드라마를 비교하며 드라마 내에서 미국 수사드라마는 수사를 하고, 일본 수사드라마는 교훈을 주고, 한국 수사드라마는 수사하면서 연애를 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매번 큰 주제지만, 이런 현상을 계속 관찰할 때 마다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2010년 한국 사회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돌풍을 일으켰을 때, 이를 씁쓸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의 요점은 대부분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경외시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에 대해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이 잘 팔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였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에서 유독 눈에 띄게 중요시 되는 것도 이런 ‘한국 사회가 실재로는 사랑이 부족하거나, 사랑에 대해서 너무 좁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이 사랑에 대한 글을 써감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초로 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때로는 우리의 생활에서 아주 당연하고 일상적이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할 것 이다. 가령 일부일처제의 풍습이나 좀 더 나아가선 ‘결혼 제도’ 그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행위들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폴리아모리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다자간의 사랑을 뜻하는 말) 등이 사랑에 대한 담론에서 주목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사랑에 대한 의문을 던지려 할 때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다. 사랑이란 것은 너무 고귀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분석이나 의문 그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에 대해서 1977년 미국의 심리학자 루빈은 “인간 신체에 대한 연구가 사람의 몸을 모독한다고 해서 수세기 전까지 그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지 못하도록 금기시하다가 결국 더 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연구를 회피하는 것도 정당화되지 못한다.”라고 언급한바가 있다.

우리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의 글은 당신이 사랑함에 있어서 끓임 없이 의심하고 분석해보라는 피곤한 메시지를 전달하진 않을 것이란 거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끓임 없이 의심해보고, 분석해보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짧은 칼럼에 그런 방대한 연구의 내용을 담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책들은 시중에서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으니 관심 있으면 개인적으로 구하길 바란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아마 관점 제시와 질문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자신에게 어떤 사랑의 유형이 적당할지 찾아가는 것은 여러분이다. 앎은 사랑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많이들 말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랑에 대한 모든 의문과 관점을 담은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첫번째 여는 글을 마치려한다. 힘들고 지칠 수도 있는 삶속에서 작은 혹은 큰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삶 그 자체를 은유하기도 하는 ‘사랑’. 지금 당신은 사랑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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