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남자의 이별통보를 받고 서럽게 우는 여자를 마주쳤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의 무정한 표정에 여자는 당황한 듯 했다. 사랑은 불현 듯이 찾아와 기존에 혼자 바라보던 세계에 존재하는 법칙들을 무시하며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 그러나 여지를 주는 순간 너무나도 쉽게 끝이 나는 것 또한 사랑이다. 과연 영원한 사랑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사랑을 꿈꾸며 바라보고 산다. 거짓으로 가득 차든 진심을 다하든 한번쯤은, 겪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엔 사랑이란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이 수두룩하다. 사랑은 흔하게 주변에 있다. 그래서일까. 사랑이라는 정의를 내리기 쉬워 보인다.

사랑의 종류는 수도 없다. 끊임없이 파생되고 파생되어 번식하며 살아가는 단세포와도 같다. 사랑을 구분하려는 노력은 많았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종류를 정의했다 한들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열정적인가 했더니 유희적이고, 헌신적인가 했더니 흑심이 가득하다는 둥.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흔히 에로스적인, 이성 혹은 동성 간의, 사랑은 루저게임이라고 한다. 서로 지려는 순간 오래 지속된다고 한다. 상처받지 않으려는 생각에 마음을 숨기고 덜 좋아하는 사람을 자처한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위험한 곡예다. 너무나도 앙상한 나뭇가지일 것 같으면서도 단단한 느티나무 같다. 이중적이다. 초라하면서도 화려하고, 단절되면서도 지속된다.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사랑은 개인들 간의 단순한 만남이나 폐쇄된 관계가 아니다. 알랭 바디우는 그의 저서 <사랑 예찬>에서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에서 시작하는 차이로부터 검증되고 실행되며 체험되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더 이상 하나의 관점이 아닌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 때, 둘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은 최초의 다수이다. 최초의 다수가 출현하는 지점, 그것이 바로 만남이라는 사건이다. 만남은 늘 돌발적이며, 구조적 필연과 어떤 인연도 맺지 않는다.

바디우는 만남 자체보다 만남 이후의 과정을 강조한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충실성이다. 결코 하나로 융합되거나, 어느 한쪽이 희생적이라거나, 계약에 의한 교환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바디우의 철학관을 따르다보니, 의문점이 들기 시작한다. 결혼은 사랑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혼을 사랑의 종착점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전래동화로 치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와 같은 식이다.

결혼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부부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여전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영원한 사랑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단호하게 결론지을 수 없는 이유는 익숙함이 사랑이라는 전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 그것 참 생각보다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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