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말이다. 공리주의는 현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방식과 관련이 있고 이에 따라 정책에도 관련이 있다. 다수의 표를 얻은 후보자와 동의를 얻은 정책이 승리를 독식한다. 이들은 ‘다수의 인정’을 받았기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리주의적 판단기준은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요구될 때, ‘대승적’ 차원에서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 상황에서 소수가 자신의 권리와 생존권을 들며 이들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부정적 수식어가 붙게된다. 지금 밀양에서는 ‘공리주의’의 한계가 보이고 있다. 2천만에 이르는 수도권 주민들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밀양시민, 특히 송전탑이 들어설 예정인 4개면 주민들은 ‘고통’을 강요받고 있다.

한편, 수도권 도시 분당에 밀양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범죄자의 교정을 위한 보호관찰소가 분당 번화가 외곽에 들어서기로 예정돼 있었지만 분당주민, 특히 학부모들의 압도적 반발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물론 법무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해 지탄을 받은 일이기도 했지만 반대위원회는 “님비라도 불러도 상관없다”,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몇 만에 이르는 주민들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결국, 법무부는 보호관찰소 이전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고 보호관찰소 이전이 마무리 될 때까지 업무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분명 보호관찰소와 송전탑, 둘 모두 혐오시설이다. 대다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앞에, 일터에, 학교 앞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은 반대할 것이다. 만약, 분당에 밀양처럼 가구당 보상금을 지급하고 보호관찰소를 이전했다면 학부모들이 이를 받아들였을까.

그럼에도 두 곳의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분당주민들은‘법무부의 도둑 이전’에 맞선 정의롭고 자신의 권리를 찾는 시민들이었고 밀양주민들은 ‘외부세력에 휘둘린 국가발전저해세력’으로 포장됐다. 힘이 있고 머릿수가 많은 분당주민들의 행동은 정당화가 되고 힘없고 수도 적은 밀양 송전탑, 백여 가구는 삶의 터전을 잃게 생겼다.

다수에 의한, 다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민주주의는 과거 신분제 타파를 목적으로 발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잃는 혁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송전탑과 보호관찰소를 둘러싼 양 도시의 주민들 간엔 엄연한 신분차가 느껴진다. 소수자에 대한 관용은커녕, 소수자가 제시한 대안 수용은 없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부정적 수식어만 붙이고 있다. 소수에 대한 폭압이 정당화되는 '자유민주주의'에 맞선 주민들은 '빨갱이'로 몰려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공리주의 기반 승자독식 민주주의가 계속된다면 또 다른 밀양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이클 센델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첫 장부터 공리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했다. 제아무리 백만부가 팔렸고 고위 관료와 정치인사이에서 선물로도 오간 책이지만 정부와 한전, 그리고 이를 다루는 언론에서는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고민은 없는 모양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에 대한 희생 강요는 하나의 폭력이다. 누구나 소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외부세력’이 되어 밀양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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