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 친구와 다투다가 입원치료가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끼리 책임이 있네, 없네 이야기를 나누시다 한 편에서 갑자기 “법대로 합시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 ‘법’의 개념에 대해 생각했었나보다. 아마도 당시 기억은 “아,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은 법대로 하는 거구나”였나 보다. 같이 싸운 친구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화해하자고 이야기를 마쳤지만 양측 부모님들의 칼날은 무뎌질 생각을 않았다.

신문사 입사 전까진 사실 ‘법’에 대해서 잘 몰랐다. ‘법’을 공부하는 것은 여러 가치들을 ‘판단’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또 ‘정의사회구현’이란 목적을 가지고 법의 잣대로 사람을 심판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 정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판결문을 가지고 기사를 써야하는 <건대신문> 기자가 됐지만 말이다.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갈등,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양측이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방법도 있고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공론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도 있다. 가장 확실한 갈등 해결법은 아무래도 강제 구속력이 있는 ‘사법부의 판단’이겠다. 사법부의 판단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과거 성폭행 사건부터 올해 법인과 노조사이의 소송까지 <건대신문> 기자생활을 하면서 매년 사법부 판단만 기다리는 사안이 발생해왔다. 이번엔 한 총학생회 선본장이 상대 선본장을 ‘도청’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할 정도다.

언제나 사법부 판단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빨리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사법부 판단에 따라 갈등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사법부 판단은 한 편이 완벽히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부분승소나 부분패소란 법적 용어가 존재하지만 승자와 패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싸움판이다. 명문대학으로의 도약을 위해, 2014년 총학생회 건설을 위한다는 이들 모두가 링 위에서 상대의 빈틈만 찾고 있다.

법은 ‘갈 때까지 간 사람들’이 아무런 잡음 없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나 본래 취지와는 달리 제살이 깎아 먹힐 수도 있는 도박적 성격만 남았다. 사회적 혼란의 해결과 안정된 사회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법이 필요하다지만 우리대학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과연 법정싸움이 필요했을까. 필연적으로 패배자가 생기는 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지 의문이 든다.

원고 승소면 피고가 물러나고 원고 패소면 원고가 물러나야하는 극단의 상황이 우리대학에도 연출됐다. 긴장감이 넘치는 ‘도박판’이 돼버린 우리대학, 여기서 ‘법대로 합시다’란 말은 모든 것을 ‘올인’하는 카드패가 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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