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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가 부끄럽나요?
홍무영 기자 | 승인 2014.08.24 20:20

   

▲ (좌)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풀밭위의 점심
     (우)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 비너스의 탄생

  편지를 대필하는 일을 하는 ‘테오도르’가 주변을 둘러본다. 지하철의 인파속에서 임신한 여배우의 d라인 누드집을 보기위한 그의 준비다. 위 내용은 영화 ‘그녀(her.2013)’의 한 장면이다. 우리는 공중장소에서, 심지어 그 장소가 미술관일지라도 나체를 보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다. 누드를 보는 나를 보는 누군가. 조금 민망하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절대시했던 과거에 누드를 온전히 예술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누드를 그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존재했는데 신화 속의 누드가 여신이나 천사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측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은 살롱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림이다. 비너스의 탄생을 축복하는 천사의 모습과 물거품을 통해 나체의 여성이 비너스 일 것이라는 유추를 할 수 있으며 이는 비록 누드이나 허용된다. 그러나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풀밭위의 점심’ 속 나체를 한 여성은 여신의 모습이 아니다. 당시 실존했던 이 여인의 이름은 빅로린 무랑(Victorine Louise Meurent)으로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은 남성과 함께 있는 매춘부 여성을 상징해 파장이 일었다. 마네의 그림은 밝은 날엔 살롱을 보며 고상한 유희를, 밤에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즐긴 파리 부르주아 계층의 모습을 폭로했다.
이 당시는 누드에 대해 참 쉬운 기준이 존재했다. “누드를 그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나체의 주인이 여신이면 가능하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기준은 의아하다. 몸이라는 같은 물질의 영역에서 말도 되지 않는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를 현대에서 반영해본다면 “노출하면 안된다. 그러나, 아이돌과 배우는 노출해도 된다.”쯤일 것이다. 어떤가, 조금은 피부로 와닿지않는가?

여러분에게 누드가 부끄럽고 부끄럽지 않은 현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닌가. 수백년 전 그림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부끄러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질문해볼 수 있다.

홍무영 기자  hmy3120@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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