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독자는 대학생, 그 중에서도 명문사학 건국대학교의 재학생일 가능성이 크다. 아직 쓰지도 않은 글의 첫머리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독자부터 예상하는 이 문장의 저의는 무엇인가. 이글의 독자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지금-여기 대한민국이라면 위험천만한 공간에서 두려움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용기가 우선 필요하겠으나, 그럴 경우 당장 눈앞에 맞닥뜨린 사건에 갇혀 위험이나 안전 등을 거리 두고 살필 겨를이 없을는지 모른다. 일종의 '부주의맹시'를 극복하면서 또 안전의 의미를 재조정하고 안전한 삶을 새롭게 모색하는 대화, 굳이 가장 안전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글의 목적이다.

2014년만큼 안전이라는 말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들었던 적 있을까. 얼핏 보기에도 안전하지 않은 곳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듭 들여다보더라도 안전해 보이는 곳이 정말 안전한지를 묻고 답하는 일이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안전염려증으로 내달리자는 말은 아니다. 안전의 총체적 결핍과 불안이라는 예외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의 중요한 삶의 일부를 기회비용으로 지불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유가 그들의 규제와 교환된다면 더욱 큰일이지 않은가. 문제는 안전불감이나 안전염려 따위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안전하지 못한지를 각성하는 것과 안전한 삶의 권리를 신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래서 대학생이다. 대학이라는 안전한 공동체에서 대학생은 얼마나 안전한가. 대학 문만 나서면 한눈에 보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삶이 뻔히 보이는 터라 오히려 안전이라는 환상의 더께를 스스로 키웠던 것 아닌지. 대학의 주인이어야 할 대학생이 자신의 주인됨을 실천하지 못하는 대학에서 안전한 삶이란 완전할 리 만무이다. 대학의 주인으로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수업권은커녕 매학기 첫 일주일을 추가신청서 들고 강의실을 전전하는 일로 시작하는 대학생들의 삶을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종의 소외, 이것은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대학생들이 그 어느때보다 빠른 속도로 주변부로 밀려나는 지금, 소외의 극복이야말로 안전한 삶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된다.

소외의 극복이 궁구하는 것은 물론 주인됨이겠으나, 우리는 그 전에 자기의 소외상태를 우선 각성할 필요가 있다. 안전하다는 이데올로기와 안전하지 못한 실재 사이의 간극을 들추어냈다면 이제 자기의 소외상태를 잊지 않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측불가능한 세계로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 길에서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우리가 경험한 안전한 세계의 안전하지 못함에 관해 대화하고 잊지 않고, 다른 삶을 모색하는 동안 소외의 극복과 안전한 삶에 조금 가까워지지 않을까. 한번으로는 부족하다. 발견한 것을 계속 기록하고, 거듭 잊지 않고, 다른 삶을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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