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자유를 실감하였을 때는 바로 첫 수강신청을 하던 순간이었다. 더 이상 새 학기 시작과 함께 칠판 옆의 빽빽한 시간표를 받아 적어야 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요일과 시간에 강의를 배치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교생활을 주체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득 찼다. 미성년자로서 제한됐던 활동 영역을 성인이 되면서 자유롭게 늘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학은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며 학생의 자치활동을 지원하고 자율성을 존중한다.
 하지만 자유를 느끼게 해주었던 수강신청이라는 제도의 일면에는 자율성이 아닌 타율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수강신청 기간은 학생들의 불만으로 가득 찬다. ‘들을 강의가 없다.’, ‘자리가 없어서 들어야 하는 강의를 못 듣는다.’, ‘수강제한 때문에 신청이 안 된다.’ 등, 매 학기 터져 나오는 탄식의 소리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수강신청 기간의 모습은 대학 졸업 후 극심한 취업난에 휩싸인 구직청년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착순으로 운 좋게 인기 있는 강의를 신청한 사람들만 자신이 원하는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며, 학과의 제한정책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청 자체를 원천봉쇄 당하기도 한다. 강의의 빈부격차 또한 심각하다. 들을 강의가 없다는 말은 개설된 강의가 수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강의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중소기업 기피현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떤 강의를 듣느냐에 따라 자신의 한학기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실업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대학생의 수강신청문제도 해법을 찾기 힘든 난제인 것일까. 희소한 자원으로 모든 소비자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개선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강신청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자본력 차이에서 비롯한 청년실업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수강신청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조율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뜻이다.
 강의에 대한 수요조사와 적극적인 피드백은 강의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현재 학교에서 시행중인 강의평가와 장바구니 제도는 문제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학교와 학생간의 심도 있는 대화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매우 아니요’와 ‘매우 그렇다’사이의 선택권만 제공할 것이 아니라 직접 학생들의 자율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강의를 원하는지, 수강신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기 원하는지 발언할 수 있는 창구를 모든 학생들에게 열어 놓고 경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학문은 대학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이며 학생에게 보장되어야 할 제 1의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이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면 학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그 원칙이 일관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학생이 진정한 자율성과 주체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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