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3월임에도 벌써 지치고 힘들고 피하고 귀찮아한다. 시작을 의미하는 줄로만 알았던 3월이 이렇게 지치게 느껴질 것이라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것은 여러분에 대한 이야기다. <건대신문>이 마주치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대표자들, 교‧직원 그리고 학우 여러분.
 음악에서 사랑을 주제로 다루는 만큼이나 기자들은 ‘취재에 잘 응해주지 않는 그들’이라는 소재를 칼럼 주제로 빈번하게 가져온다. 너무 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언급되는 만큼 기사로 모두 나오지는 않는다. 취재원이 연락을 무시하고 화를 냈다는 동료 기자들의 제보 아닌 제보를 듣다보면 내 경험이 떠올라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이 드는 한편 이제는 그런 취재원의 귀찮음 또한 공감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내부에서는 진담 반 우스갯 소리로 이야기한다. “나 같아도 진짜 귀찮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귀찮음은 당장의 귀찮음이며, 그것은 불편한 것을 피하고자 하는 근시안적인 인간의 욕구라고 생각한다. 기자로서 우리는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보는 것임에도, 그들은 개인으로서 자신을 내세우며 개인으로서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가지고 취재에 응한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주어진 역할을 맡거나 대표하며 본인이 맡은 위치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에 따라오는 책임을 귀찮아한다면 그 자리에 있음으로서 누리는 권한과 힘 또한 놓아야하는 것이 맞다.
 세상에는 아무리 통합하고 이해하고 줄이려 해도 보수와 진보, 이성과 감성의 구분과 같은 두 가지 정도의 입장은 남는 듯하다. 취재원과 기자 사이의 입장도 이해하려고 해도 한 가지 입장으로 줄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제 취재원의 귀찮음까지는 이해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기자로서 내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은 철저한 취재 준비를 통해 쓸데없이 취재원의 시간을 뺏지 않는 것까지다.
 취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건이 있으면 사건을 이루는 인물들이 있고 취재원이 되는 그들을 통해 공론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가뭄에 콩 나듯 취재에 성실히 응해주는 취재원을 칭찬하고 위안을 얻는 것이 현실이다. 취재를 하지 않으면 소설을 써야하는데 취재를 해도 비난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걸 왜 <건대신문>이 알려고 하죠?”라는 지겨운 질문에 “당신이 어떤 권한으로 그걸 숨기려하죠?”라고 답하고 싶다.

저작권자 © 건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