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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신의 겸손한 제안> '핑크빛 고해소'
심재호 기자 | 승인 2015.08.25 16:27

 만약 주변에 지하철로 30분 넘게 통학하는 친구가 있다면 한 번 물어보도록 하자. “1교시 들으러 학교 올 때 기분이 어때?” 그럼 그 친구는 아마 당신의 얼굴을 붙잡아 자기 겨드랑이에 처박고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로 그런 기분이야.”
매일 아침 힘차게 달리는 겨드랑이에 얼굴을 처박는 건 당신의 불쌍한 친구 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가족일 수도, 연인일 수도, 혹은 미래의 연인일 수도 있다. 훗날 연인의 얼굴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그건 필시 지옥철이 남긴 아픈 흉터이니, 그것마저 보듬어 사랑해주도록 하자.

이러한 공간인 지하철에 최근 재밌는 변화가 하나 생겼다. 소위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것인데, 서울의 모든 지하철 각 칸마다 중앙 좌석 양 끝에 하나씩 배치돼 있다. 이 도발적인 핑크빛 고해소 앞에서, 임산부들은 자신의 뱃속에 새 생명이 꿈틀대고 있음을 소상히 고백해야 한다. 출근길 내내 서서 가는 형벌을 피하고 싶다면 말이다. 물론 애석하게도, 고해성사는 그 죄만을 사해줄 뿐, 그로인한 벌은 면책시켜주지 않는다.

 이 핑크빛 고해소 설치 정책은 마케팅적 측면에서 상당히 전략적이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다. 눈에 잘 띄는 동시에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컬러를 선택한 것도 노련함을 엿볼 수 있는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여기엔 아주 교묘하면서 치밀한 ‘틀 짓기(framing)효과’가 사용됐는데, 그 수준이 상당하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과 위치에 배치함으로서 대중에 쉽게 노출되도록 한 점에 주목해보자. 이 좌석은 ‘임산부’와 ‘특별석’의 이미지가 몹시 강조돼 있다. 이로써 사람들은 마치 임산부가 굉장히 많은 편의를 제공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는 그저 스티커 몇 장과 핑크색 물감으로 의자 두 개를 꾸며놨을 뿐인데 말이다. 투자 대비 사업 홍보 효과가 굉장하다. 또한 사업의 성패를 전적으로 시민들의 일상적 도덕에 맡김으로서, 마치 임산부들의 불편함이 시민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연출할 수 있게 구성했다. 모든 국가기관에 비치되어 있는 ‘부정적 통계자료에 대한 핑계거리 목록’이 한 단계 더 풍성해지는 건 덤이다.

 그런데 만약 이 사업이 단순 마케팅만이 아니라 출산 장려 및 임산부 배려까지 목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더 좋을까? 필자는 임산부 배려석 맞은편에 ‘국제노동기구 권고 출산휴가 최저 기간 126일’ 좌석을 추가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다. 컬러는 정열의 레드로 하고, 좌석 밑 바닥에는 ‘근로기준법 보장 출산휴가 기간 90일’스티커도 붙여주면 좋을 듯싶다. 이러면 임산부들이 좀 더 기분 좋게 달리는 겨드랑이에 몸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심재호 기자  sqwogh@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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