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을 뽑으라면 그것은 ‘관점’의 마술이라 하겠다. 하나를 여럿으로, 여럿을 하나로, 그런 것을 저런 것으로, 저런 것을 이런 것으로, ‘관점’ 위에서 모든 것은 변신할 수 있다. 대학은 이 기막힌 마술쇼의 ‘미녀 도우미’역할을 오랫동안 맡아왔다. 능숙한 파트너다. 어느 날에는 ‘고고한 상아탑’으로, 또 어느 날에는 인생을 배우는 ‘작은 사회’로, ‘시대의 양심’으로, 그리고 또 언젠가는 ‘인재 양성소’로, ‘기업의 하수인’으로, 수많은 역할들을 소화해 왔다.

 하지만 무대 위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정작 대학의 원래 모습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두루뭉술하다. 대학은 교육기관인 것도 사실이다. 연구기관인 것도 사실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가 마치 상품 원산 지명을 확인하듯 대학의 간판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고, 사회적 책임이 있는 기관인 것도 사실이다.

 만약 누군가가 ‘국가가 대학을 자신의 역할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또는 ‘대학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 국가가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먼저 그 대학의 본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른 바 ‘프라임 사업’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바로 이 대목에서 국가가 마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관점’의 마술이다. ‘무대 위의 대학’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대학’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대학의 역할이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겠다면, 우선 대학이 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지 밝혀야 한다. 사람들에게 트릭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대학운영은 마술쇼의 소재가 아니다.

 결국 대학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계속해서 이어져가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마술을 부릴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지 서로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 끝에는 어떤 모습의 대학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 중 하나가 대학의 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더라도, 지금까지의 마술쇼보다는 훨씬 더 믿을 만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이 될 것이다.

 막바지에서 고작 ‘명색이 대학신문기자인 우리도 모르겠다.’는 부끄러운 고백으로 마무리됐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고민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대학도 ‘자아 찾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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