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 여성들은 “여혐” 사회를 성토하였다. 많은 이들이 포스트잇을 붙여 이를 표출하였다. 일부 남성은 이를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해 반격에 나섰다. 이는 언론에 의해 남녀 대결로 재이슈화되었다.

그런데 그 포스트잇이 스크린도어 수리공 청년의 죽음 이후에도 등장한다. ‘이번엔 남자가 희생자다, 이래도 여혐사회냐’하고 그 일부 남성이 여성들 보란 듯이 붙인 것 같진 않다. 포스트잇을 붙인 건 출퇴근하러 지친 몸으로 지하철역을 오가는 남녀들이다. 이 두 사건을 이어주는 포스트잇의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여혐”은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공격심리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여혐”은 가부장 시스템 하에서 “여자”라는 약자집단에 대한 멸시가 각 개인 안에 내면화된 현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여혐을 가진다. 자신이 성추행 피해자임에 불구하고 자기비하에 빠진 여성, 며느리와 연대하기보다 가부장인 남편의 가문에 결속되어 며느리를 괴롭히는 일부 시어머니가 그 예이다. “여혐”은 단지 생물학적 남성이 생물학적 여성에게 갖는 미움이 아니란 얘기다.

많이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가부장주의에서 “가부장”이 남성 모두를 지칭한다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오늘날 실질적인 의미의 가부장은 일상적 가정에 없다. 가부장은 일종의 공동 산업 단위로서 가족 개념이 성립했을 당시, 한 산업 단위의 수장을 의미하였다. 남아, 청년, 남성 노동자, 성소수자 남성, 심신 미약자 남성들은 가부장이 아니었다. 굳이 오늘날 가부장을 따지자면 집안 자체가 하나의 산업단위인 기업의 총수 정도가 아닐까.

스크린도어에서 죽어간 노동자 청년은 훗날 누군가의 남편과 아버지는 되겠지만 반드시 가부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부장 시스템은 여성들 외에도 수많은 이러한 남성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혐오”한다. “여혐”은 가부장 시스템 하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대상들을 “여성”으로 통칭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강남역에서 여성을 살해한 그 남성도 가부장 시스템을 내면화한 남녀들에게 자존감을 부정당한 사람이다. 그의 “여혐”은 외면상 타인을 향했지만 비가부장인 자신에 대한 환멸과도 통했을 것이다.

비가부장 남성 모두가 싸워야 할 대상은 여성이 아니다. 싸워야 할 대상을 직시할 때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따뜻한 연대자가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한 노동자 청년이 죽어간 자리에 포스트잇을 붙여 그 마음을 드러낸다.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여진 포스트잇과 강남역 입구에 붙여진 포스트잇은 모두 “비(非)가부장 혐오” 사회에서 희생된 “비(非)가부장 남녀”에 대한 애도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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