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치가 난무하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코드가 있다면 아마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한다. 나르시시즘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닿을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죽은 후 수선화로 피어난 나르시서스의 신화에 그 어원을 둔다. 사회적 현상이자 내면적 가치이기도 한 나르시시즘은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일종의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 자기중심성 등을 의미하며, 내가 특별하고 내가 잘났다는 자의식과 연결된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의 강력한 자양분은 물론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이다. 21세기의 상품은 사용의 대상이기보다는 남과 나를 구분해주는 기호이며, 남들보다 더 좋은 상품으로 치장하는 과시소비를 통해 나의 특별함이 빛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은 또한 자신감, 자존감, 당당함 등의 의미군과 연결되며, 억압적 전통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이란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근대 개인주의의 충실한 적자이기도 하다. 하층계급, 여성, 흑인 등의 소수자에게 자신이 처한 조건이 아닌 나 자신이 나를 규정할 수 있다는 개인주의는 거의 혁명적이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혹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위와 같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는 정신분석학 내부에도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에게 나르시시즘은 타인에게로 가야할 관심을 자신에게만 쏟음으로써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히게 되는 일종의 정신증이었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우울증과도 깊이 연관된다. 우울증이란 멜랑꼴리적 주체가 자신과 분리된 타자와 거리를 두고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을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하다가 그 사랑이 떠나가자 대상에 대한 증오를 (그와 동일시된) 자신에 대한 증오와 공격성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기심리학의 창시자인 하인즈 코헛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어릴 때 대상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결핍을 꾸준히 보충함으로써 성취해야 할 자아의 과제이다. 어릴 때 내가 최고라는 ‘과대자기’와 무한히 존경하는 부모라는 ‘이상화대상’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자아의 나르시시즘에 구멍이 생기며 이는 커서도 꾸준히 보충해나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코헛의 나르시시즘 개념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내가 특별하고 잘났다는 자기과시적 나르시시즘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우리는 양날의 칼로서의 나르시시즘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리저리 휘두르며 산다. 한편으로는 자기과시적인 sns 활동에 목숨 걸지만, 또한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명제를 새기며 무쇠의 뿔처럼 혼자 가려고도 한다. 21세기 말 경, 나르시시즘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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