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는 ‘샤이론’의 삶을 담은 영화다. 가난한 흑인 ‘샤이론’은 성 소수자이며,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와 둘이 살고 있고, 엄마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다. 여기에 따뜻한 아버지같은 존재인 후안과 케빈이라는 단짝 친구를 만나게 되지만 결국 후안은 죽고 케빈과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영화는 샤이론의 유쾌하지 않은 삶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감각적인 영상은 그의 삶과는 다르게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어떻게 불리고자 하는지.

 

영화의 안팎으로 존재하는 소외

이 영화의 주인공은 흑인이다. 게다가 영화를 만든 감독도 흑인이다. 이 이야기를 선두에 꺼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흑인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이 얼마나 평등하냐는 질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영화 <문라이트>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Oscar)에서 작품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훌륭하다고 평했던 이 영화가 작품상을 받기 직전까지 받았던 질문이 있다. 작품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감독이 흑인이라는 이유와 흑인의 이야기라는 꼬리표가 이 작품의 수상에 많은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바로 소외를 양산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거머쥔 것에는 많은 의미들이 내포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는 소외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소외는 영화의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작용한다.

 

타인에 의해 불리는 이름, 정체성.

우리가 갖고 있는 이름과 별명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나’라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불릴지 스스로 결정한 때가 거의 없을 것이다. 태어날 때 지니게 되는 이름도 타인에 의해서 붙여지고, 별명이라는 것 또한 타인에 의해 명명된다. 나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한 나의 정체성의 집합이라고 여기는 이름이라는 속성은 결국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름과 별명(혹은 애칭)에 나의 정체성이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결국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모습은 타인과 함께 만들어낸 합작은 아닐까.

영화 속 주인공 ‘샤이론’은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세 가지 이름을 지닌다. 영화는 3막 구성으로 리틀의 시절, 샤이론의 시절, 그리고 블랙의 시절을 나눈다. 어린 유소년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이 세 가지 이름은 성장의 단계별로 ‘샤이론’을 담아내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세 가지 이름은 ‘샤이론’이 스스로 만든 이름이 아니다. 모두 타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타인에 의해 불린다. 리틀로 불리는 시절에는 한없이 작은 샤이론이 등장한다. 리틀이라고 불릴수록 그는 더욱 숨길 바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내세우기 힘겨워 한다. 그의 자아는 아직 자라나지 못했고, 자라나려는 몸부림조차 타인이 명명한 ‘리틀’이라는 이름에 갇히게 된다. 스스로도 ‘리틀’이 되어가는 것이다. ‘샤이론’으로 살아가던 소년기에는 ‘리틀’과 ‘블랙’ 그리고 ‘샤이론’이 혼재된다. 그를 괴롭히는 이들에게는 ‘리틀’, 그를 있는 모습의 그로 바라보려는 이들에게는 ‘샤이론’, 그리고 그를 좀 더 강하게 만들고파하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는 ‘블랙’. ‘사춘기’라고 불리는 소년기에 인간은 저마다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고 했던가. ‘샤이론’또한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 많은 혼란을 겪는다. ‘블랙’이 되고서는 더 이상 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고 강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강함은 그 자신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방어기제의 모습이었다.

‘리틀’의 시절에 만났던 ‘후안’은 그에게 절대 본인의 인생을 타인의 선택에 의해 흘러가지 않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블랙’이 된 성인 ‘샤이론’은 결국 타인이 권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인 ‘케빈’을 다시 만나고서야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모습과 진짜 나의 모습. 진짜 샤이론은 인생의 막, 그 경계의 어딘가에 불안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것만 같다.

 

소외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해방을.

이 영화 속 주인공은 흑인이기도 하지만 빈곤층이기도 하고 성 소수자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소외받는 계층들의 집합체라고 해도 될 법하다. 그는 그 스스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사회는 그를 소수자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달빛 아래에 서 있는 모두가 파랗게 보인다’는 후안의 이야기는 ‘샤이론’이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사회에서 아무리 소외받는 계층이라도 결국 달빛 아래에 서면 파랗게 보이는 평등한 인간일 테니.

마약중독 치료소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달빛 아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영화는 처음으로 달의 형체를 보여준다. 상처받았던 ‘샤이론’에게 위로를 건네듯. 소수자로 소외받는 모든 이들에게 자유로운 해방을 선사하듯.

 

푸른 바다, 드넓고 시원한 세상으로.

영화에서 바다는 특별한 장소다. 샤이론에게 따뜻한 존재였던 후안과 케빈 모두 바다와 연결되었다.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고, 위로와 조언을 받았던 장소였으며 케빈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보였던 장소였다. 답답한 샤이론의 마음은 파도와 함께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드넓은 세상으로 시원하게 나아가고픈 샤이론의 욕망이 바다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달빛 아래 선 모두가 블루.

3막으로 구성되는 샤이론의 삶에서 모든 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엄마와 케빈이다. 그들은 샤이론을 소외된 존재로 만들기도 하였고, 또한 그 스스로를 자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케빈이라는 존재는 샤이론이 스스로를 온전히 내보일 수 있었던 존재였고 ‘블랙’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이기도 했다. 그런 케빈을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전히 바다가 등장한다. 샤이론을 따스하게 치유해줬던 바다를 안고 케빈이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블랙’이 되어버린 샤이론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짜 샤이론으로 살아가고 있는것이 맞는지.

샤이론이 다시 케빈을 만남으로써 본인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온전한 샤이론으로 탄생하게 된 것일까. 영화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달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어린 샤이론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마치 그가 그 스스로를 찾기 위해 혼란의 시간들을 보내기 이전부터 그는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고 일깨워 주는 듯 말이다. 샤이론은 처음부터 파랗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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