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 있는 사람에게 “삐쳤냐”고 물어보는 것은 퍽 비겁한 행위이지 않나 생각해본다. 자신의 과실을 순식간에 상대방의 아량과 관용 문제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대뜸 “말이 참 없네”라고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종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 하나로써 어색한 상황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전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저런 말을 뱉고서도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개인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의 문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로 말이 많은 사람한테 “넌 왜 이렇게 말이 많니?”하고 묻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 즉 말수가 적은 사람에게 지적하는 경우는 허다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내향성과 외향성 중 ‘외향적 이상’이라는 한쪽으로 치우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자아는 외향적 존재일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해있다. 물론 외향성도 매력적인 성격 유형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것을 반드시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적인 기준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이는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색안경이다. 역시 비논리에는 가속도가 쉽게 붙는 듯하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성격 요인 다섯 가지를 Big Five라 일컫는다. 요인 다섯 가지에 대한 명칭은 연구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외향성’, ‘우호성’, ‘성실성’, ‘신경증’, ‘개방성’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요인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스펙트럼 상에 놓이게 된다. 즉 개인이 극도로 외향적 혹은 극도로 내향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외향성과 내향성은 에너지의 방향 차이로 구분한다. 외향성은 에너지를 외부에서 받기 때문에 자극을 추구하고, 관심사가 자신보다는 타인이나 외부세계에 있다. 반면 내향성은 비교적 차분하고, 자신의 내면을 보다 관심 있게 주시한다. 따라서 이 둘 중 하나가 우위에 있거나 하지 않은데도, 내향적인 사람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편견 역시 공공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외향적이다’는 말이 곧 ‘사회성이 좋다’는 뜻으로 직결될 수는 없다. 외향적이어도 우호성이 낮다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내향적이어도 우호성이 높다면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인간관계에 능숙할 조직의 지도자들이나 임원들 또한 내향적인 성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비롯하여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도 그러하다.

만일 누군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외향적으로 행동하라고 권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그런 체 행동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페르소나를 쓴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존재하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온종일 크기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리라 짐작한다. 우리 사회는 내향성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외향적인 성격으로의 지향점을 내세우기만 한다. 235mm의 신발을 신는 내게 270mm의 신발만을 신으라 하는 격이다. 이처럼 일말의 이해와 존중 없는 요구는 미성숙함을 넘어선 일종의 결례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타고난 기질을 변화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나 진배없다.

하버드 대학 정신과 교수는 “금속으로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 수는 있지만 유화를 그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각자가 지닌 가능성과 차이점으로 저마다의 정체성을 만들어 갈 수는 있지만 지니지 않은 요소로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외향성이든 내향성이든, 우리 모두가 각자가 지닌 고유한 기질을 존중하여 서로를 보다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제목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랑한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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