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는 친구가 있다. 소설을 쓰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왜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밤을 보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계속 반복됐다. 진전이 보일 것 같으면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처음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납득될 만한 어떤 설명이었다. 나는 이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숙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가끔은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런 것들이 이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느낌은 오로지 친구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떠들던 정겨운 풍경뿐이다. 어느새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친구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것이 여기까지 왔다. 여러 시에 대한 말을 읽었다. 김소연 시인의 말. “부재하는 능력과 존재하는 기억이 한 몸뚱이에서 녹슨 뼈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시인은 어쩌면 받아 적는 중이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시인은 투명해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사라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정확해지는 사람. 그렇지 않을까.” 시인은 패배하는 사람. 패배함으로써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 “그것은 어딘가로부터 몰려와 낡은 것을 휩쓸고 어딘가로 다시 몰려가는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정지이고 정지의 침묵 속에서 비극을 바라보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서서히 바뀌는 것이다”(황병승, 「첨에 관한 아홉소(ihopeso) 씨(氏)의 에세이」) 좋은 시를 읽으면 나도 그렇게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나, 둘 써본 문장들이 모여 시가 된 것 같다. “나는 나 자신만큼이 아니라 내가 볼 수 있는 것 것만큼 크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나는 좋은 시를 읽으면 내 자신이 조금 변화되는 기분을 느낀다. 문학을 왜 하는지 의문을 던지던 내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부족한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나희덕 시인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항상 나를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여자친구 그리고 오랜 기간 나와 함께 밤을 지새운 친구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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