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내가 할 얘기는 인간 외의 것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 우린 죽어가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죽기 전에 얼마나 오래, 많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이다. 누가 더 행복을 누리느냐, 늙어서도 얼마나 건강한 몸을 가지느냐 등은 ‘어차피 죽어가는 우린 동등하다.’ 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삶을 즐기고 있는지를 과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서 난 죽음을 통해 인간이 평등하다는 등의 다소 공산주의적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불쌍한 자를 돕자는 말도 아니다. 화려한 것만을 보고 듣는 것을 통해 늙어가고 죽어가는 두려움을 외면하고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모습을 인간 외의 죽어가는 것들에 대입하고 그 두려움에 직면해 보자는 것이다.

물고기를 선택한 이유는……. 우린 지능이 높아 교감이 가능하거나 고통을 호소한다는 이유로 반려동물, 특히나 개와 고양이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가족 구성원으로 삼고 계속해서 보호법을 만든다. 언어의 힘은 참 신기하리만큼 강하다. ‘반려’동물을 먹거나 학대하는 것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여기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 가치가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인간이 가장 고귀하기에, 인간과 같은 가치를 지녔기에 이 반려 동물들 또한 고귀한 것. 그게 이유다. 모든 생명이 고귀하다고 느끼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갈 리가 없다.

이런 사회현상에 불만은 없다. 오히려 찬성한다. 다만 그 사고의 폭을 ‘반려’동물을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까지 넓혀 보자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횟집 어항 속 어패류를 보면 인간이 생선이나 조개류 에겐 이상하리만큼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나만 그런가 보다. 산 채로 썰기, 산 채로 불판에 구워 먹기, 산 채로 쪄 먹기 참 다양하게도 먹는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생명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죽이고 먹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걸치는 옷 한 벌 속에, 들이쉬는 공기 속에,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그 순간 그 장소에서 그 행동을 함으로써 지구의 무수한 생명들이 소비된다. 그렇기에 난 나를 위해 죽어가는 모든 것에 고마워하며 살아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의 존재는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기에 성립되니까.

그냥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취미가 직업이 되는 것에 고민 없이 달려들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가장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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