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성호(생과대
설성호(생과대·식유20)

 

바쁨이 곧 잘난 것이 되어버린 사회의 현실. 이력서에 언급할 스펙 한줄이 소중한 대학 생활 속에서 지금의 여행은 어느새 누군가에겐 배부른 사치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된 듯하다.
한국 여권의 위상이 오르고 저비용 항공사가 성행하면서 우리 세대의 대학생들은 이전에 비해 대단한 결심과 노력 없이도 다양한 여행지를 찾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게 되었지만, 반대급부로 모두가 여행자가 된 세상 속에서 여행의 매력도와 당위성이 크게 떨어져 버린 것이다.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뻔해진 여행담 속에서 특별함을 얻기 위해서는 이젠 ‘어디를’ 다녀왔냐가 아닌 ‘무엇을’ 얻어오냐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도 스펙도 그 경험을 재산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선 결국 성과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고학년이 되고 졸업 이후의 앞길을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시기를 보내며,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여름방학 기간을 빌어 동행자 없는 홀로서기 여행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무언가 중대한 깨달음을 바라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대단한 것을 추구하다 단조로움의 미학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산티아고가 쥐여줄 조언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묵묵히 배낭을 추렸다. 본인의 배낭 무게가 몸무게의 10%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도통 10킬로 밑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배낭을 들고서 비행기와 야간버스를 통해 순례의 시작점인 ‘생장’에 당도했다.
피레네산맥 넘어 닷새가 지났을 즈음, 난 오른쪽 발목이 완전히 기능을 잃어 스틱과 다른 한발로 겨우내 삼족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발목이 노랗게 변색된 상태였고, 그때부터는 매일 물집들을 밤마다 터트리면 이후 물집 안에 새로 솟아오르는 물집을 터트리는 연속 안에서 길을 이어 나가야 했다. 휴식 없는 운동이 오히려 고통을 마비시킨다는 ‘행군 효과’ 덕에 극심한 배고픔에도 점심을 포기하는 날도 있었다.
난 생존을 위해 신념 몇 가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것을 짊어진 채로만 걷겠다는 의지 대신 이틀간 배낭을 다음 숙소로 전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 세면세탁은 비누로 통일, 일주일 이상 손대지 않는 물건은 과감히 버려 배낭 무게를 줄였다. 또한 매일 27km 이상의 목표 대신 좀 더 유동적인 일정을 짜기로 결정했다. 이 중에서 일정 조정을 결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경쟁에서 벗어나고자 온 여행이 어느새 타인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강박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배후도 실체도 없는 끈을 비로소 놓고 나니 드디어 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목적지와 가까워질수록 진척도보다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으로 나아가며 변해가는 풍경과 풍습들을 바라보는 재미를 느끼며 오늘 하루의 소중함과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결국 늘 똑같고도 새로운 순례자로서의 생활 서른하고 이튿날째, 드디어 800km를 마무리하고 목적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도달했다. 가장 느린 여행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교훈을 얻으며 이렇게 여행은 내게 또 한권의 공부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취미보다 특기 칸에 어울리는 여행으로 나를 꾸며나가고자 한다. 당신은 어떤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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